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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그리스 최초의 미노스 문명

     

     

    미노스 문명

    고대 그리스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0년 전인 기원전 2800년 크레타 섬에서 시작됩니다. 에기해 남부에 있는 이 섬에서 그리스 최초 문명인 미노스 문명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은 이후 천년간 외부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고 그들만의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바다와 접해 있어 인근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게 된 이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도 교류하면서 많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크레타인들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찬란한 문명을 코피울 수 있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페니키아의 공주 에어로파를 보고 한눈에 반한 제우스가 황소로 변신해 그녀를 크레타 섬으로 납치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에어로파에서 이름을 딴 지역이 바로 유럽 대륙입니다. 에어로파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미노스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그는 이후에 크레타의 왕이 됐습니다. 우리는 그가 기원전 1500년경에 미노스 문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었을 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레타 문명을 흔히 미노스 또는 민호와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미노스는 그가 왕이 되는데 도움을 준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왕비에게 저주를 걸어 왕비가 소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결국 왕비는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괴물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미노타우루스였습니다 미노스는 그런 아들이 부끄러웠지만 차마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노스는 그의 아들을 크노소스 궁전에 있는 미로의 가둬놓고 인간을 잡아와 그에게 먹이로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크레타의 많은 유물에서 그들이 황소를 숭배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때 전설로만 여겨졌던 크노소스 궁전이 실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였던아서 에반스가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노소스의 발견을 통해 미노스 문명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될 문명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궁에서 발견된 여러 정교한 유물들과 프레스코 벽화들이 미노스 문명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가장 큰 발견은 여왕의 방이었습니다. 여왕의 방에는 욕조가 있는 욕실뿐만 아니라 물을 외부에서 끌어올 수 있는 테라코타 광과 물로 용변을 흘려보내는 수세식 화장실이 발견됐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이미 현대식 화장실이 완비됐었다는 겁니다. 한편 크레타 선 북쪽에 있는 그리스 본토에서 한 무리의 이민족이 등장했습니다.

     

    기원전 2000년경에 처음 등장한 이들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쪽에 있는 평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인도 유럽인이었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착한 그리스는 험준한 산이 가득하고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 왕국을 건설하기에는 불리한 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미케네와 티린스 그리고 필로스와 아테네 같은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을 건설했습니다. 폴리스라 불리게 된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미케네가 가장 큰 세력을 떨쳤기 때문에이 문명은 미케네 문명이라 불립니다. 얼마 후 이들은 남쪽에 있는 민호스 문명과도 접촉하게 됩니다.

     

    하지만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은 미케네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앞선 문명인데다 일찍이 강력한 해군마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신화 이야기를 이어가면 미노스 왕에게 굴복한 아테네는 해마다 7명씩의 소년과 소녀를 곡물로 바쳤고 미노스 왕은 이들을 미노타우루스에게 먹이로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바친지 3년째가 되던 해이를 보다 못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자진해서 크레타 섬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미궁 속으로 들어가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죽이고 무사히 탈출하게 됩니다.

     

    이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 본토의 여러 도시들이 미노스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들에게 공무를 바쳤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미노스인들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인 미케네인들은 점차 강성해졌습니다. 이 시대 유물을 통해 미케네인들이 활발하게 해상무역에 참여해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심지어 미노스인들로부터 문자까지 도입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로운 성향의 미노스인과는 다르게 미케네인들은 전쟁과 용맹을 숭상하는 호전적인 민족이었습니다.

     

    기원전 1500년경 조금씩 힘을 기른 미케네는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힘을 합쳐 크레타를 침공했습니다. 아직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해서 이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정황상 미키네인들이 얼마간 크레타섬을 군사적으로 점유했다는 사실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미케네의 점유기간은 길지 않았고 이들은 곧바로 그리스 본토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찬란했던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은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크레타가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화산 폭발로 인한 멸망입니다. 미케네가 침공했던 비슷한 시기에 크레타 선 북쪽에 위치한 산토리니 섬에서 대규모 화산 폭발이 있었습니다. 이  폭발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산토리니 섬 중앙부를 날려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로 무려 100m 육박하는 해일이 에게해 여러 섬에 강타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레타 섬 또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약탈과 방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설의 대륙인 아틀란티스가 크레타 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틀란티스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플라톤이었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조상이 솔론으로부터 아틀란티스를 전해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솔론도 아틀란티스를 직접 조사한 것은 아니었고 그가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 고위 사제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내용이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플라톤은 그의 저서에서 아틀란티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기둥 바깥에 살던 이들과 그 안쪽에 살던 이들간에 전쟁이 있은지 9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테네가 이끄는 동맹국들이 연합군을 잃었고 아틀란티스의 왕들은 이들을 상대로 군을 이끌었다. 먼 옛날 아틀란티스의 땅을 할당받은 포세이돈은 클레이토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 사이에서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포세이돈은 이들에게 땅을 나눠주면서 그 중 장남이었던 아틀라스에게 이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그 성과 그 주변 바다는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틀란티스는 리비아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컸다.

     

    아틀란티스의 왕들은 그 어떤 왕들이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소유했었다. 아틀란티스는 그들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했으며 이들이 가진 부로 외국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가져올 수 있었다. 아틀란티스 곳곳에서 오리칼쿰이라는 광물을 채굴할 수 있었는데 금을 제외하고는 가장 값비싼 귀금속으로 여겨졌다. 이 밖에 많은 목재와 코끼리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있었으며 온갖 향기로운 과일들이 이 섬에서 무성하게 자라났다.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섬에서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틀란티스인들은 신전과 궁전 등 여러 건축물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들은 그곳에 바다와 연결되는 운하를 만들어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후에 큰 지진과 홍수가 있어 단 하루 만에 아틀란티스와 그 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 위치가 헤라클레스의 기둥 서쪽이라고 말했으니 아틀란티스가 존재했다면 대서양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이 말하는 헤라클라스 기둥은 단지 먼 서쪽을 의미했으며 이것이 크레타 섬이라는 주장이라고 합니다. 

     

    아틀란티스의 실존 여부는 옛날부터 큰 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4세기에 활동했던 철학자 크란토르는 이집트에 편지를 보내 아틀란티스에 대한 플라톤의 말이 거짓말인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이집트 신관은 플라톤이 한 말이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미노스 문명이 갑작스럽게 몰락한 것과는 다르게 이들로부터 문화와 기술을 전수받은 미케네인들은 지중해 새로운 강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미케네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을 다룬 이야기가 바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입니다.

     

    트로이 전쟁

    호메로스에 대해 알려진 건 그가 소아시아 출신의 장님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호메로스에 대한 기록이 워낙 적어서 그가 한 명이었는지 아니면 여러 명의 시인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고의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호메로스는 호메로스는 문학뿐 아니라 정치와 철학 등 서양문명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리아스에서는 여러 신들이 그리스와 트로이 편으로 나뉘어 직접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신들이 개입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화적 요소를 최대한 빼고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였습니다. 스파르타를 방문한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와 그의 아내 헬렌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헬렌은 그리스 최고의 미인이었는데 파리스는 메넬락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헬렌을 데리고 트로이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파리스가 헬렌을 납치한 건지 아니면 헬렌이 파리스를 따라 함께 도망친 건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내가 사라지와 멘델라우스는 형 아가멤논이 다스리고 있던 미케네를 찾아갔습니다. 메넬라우스가 아가 멤논에게 트로이를 공격해 아내를 되찾고 싶다고 말하자 아가 멤논은 그리스 모드 왕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대군을 조직했습니다.

     

    일리아스에서는 이때 동원된 배가 총 1186척이었다고 합니다. 배 한 척에 50명에서 100명이 탑승한다고 보면 대략 10만명의 병사가 트로이를 공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 전역에서 도시 하나를 공격하는 거였기 때문에 객관적인 전력은 그리스 쪽이 훨씬 더 유리했습니다. 게다가 아가멤논 휘야에는 아이아스와 디오메데스 그리고 오디세우스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최강의 전사는 단연 아킬레우스였습니다.

     

    그런데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여인 브리세이스를 빼앗아가자 빈정이 상한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그를 위해 싸우는 걸 거부했습니다. 한편 트로이군은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빠진 틈을 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 그리스의 아킬레우스가 있다면 트로이에는 헥토르가 있었습니다. 그의 동생 파리스가 메넬라우스와의 결투에서 도망가려고 하는데 비겁한 모습을 보인데 비해 헥토르는 영웅 중에 영웅이었습니다.

     

    헥토르는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트로이와 그리스 모두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10년간 죽인 그리스 병사들이 총 31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헥토르 거의 혼자 힘으로 트로이를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헥토르의 엄청난 활약으로 그리스는 전쟁에서 패할 위기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가장 아끼던 파트로 클로스를 헥토르가 죽인 것이었습니다.

     

    콰트로클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때까지 움추리고 있던 아킬레우스가 드디어 행동에 나섰습니다. 복수에 눈이 멀었던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에게 결투를 신청하자 헥토르는 달아나지 않고 결투에 응해했습니다. 두 주인공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결투는 일리아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투에 앞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누가 죽든지간에 시신은 가족에게 돌려주자고 제안했지만 아킬레우스는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결투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용맹한 핵토르라 해도 아킬레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창으로 헥토르의 목을 찔렀는데 숨통이 끊긴 건 아니어서 헥토르는 아직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헥토르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시체를 부모에게 돌려달라고 부탁하자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해봤자 소용없다 너가 한 짓을 생각하면 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날로 씹어 먹는다 해도 시원치 않을거다. 너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너의 무게만큼의 금을 준다 해도 너의 시체는 개와 새들에게 먹이로 주겠다. 그렇게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죽은 헥토르를 전차에 묶어 끌고 다니면서 그의 시체를 모욕했습니다. 그 순간 성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트로인들은 충격에 빠졌고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저녁 프리아머스는 아들의 시체를 돌려받기 위해 아킬레우스를 찾아갔습니다.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아들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자 마음이 약해진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줬습니다. 하지만 그 후 트로이가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일리아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도 일리아스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트로이는 오랫동안 신화에나 등장했던 상상의 도시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1870년대 일리아스에 영감을 얻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하며 실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실제 유적이 트로이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트로이는 흑해를 통과하는 배로부터 통행세를 받아 많은 부를 축적했다고 합니다. 트로이 전쟁의 진짜 원인이 무역전쟁이거나 단순한 약탈 행위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케네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1200년경에 유럽과 아시아에는 원인 모를 재앙에 닥쳐 약 300년에 걸친 기나긴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