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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도시국가 폴리스와 스파르타 이야기

     

     

    도시국가 폴리스

    기원전 800년경 그리스는 오랜 암흑시대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안정을 되찾은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 불리는 수많은 도시 국가를 세웠습니다. 도시국가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지만 같은 언어를 공유한 덕분에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고유의 문화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올림픽 경기와 신탁이었습니다.

     

    첫 번째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열렸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올림픽이 열렸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올림픽은 4년마다 한 번씩 펠레폰의 소스 북서쪽에 있는 올림피아에서 열렸습니다. 이때 그리스 본토뿐 아니라 지중해 흩어져 있던 그리스의 여러 식민지에서도 선수들을 보내왔습니다. 선수는 나체로 경기를 치렀는데 오직 남자들만 참가할 수 있었고 여자들은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경기 종목으로는 달리기와 멀리뛰기 원반 던지기 창 던지기 그리고 레슬링이 있었는데 이후 사두 전차 경주가 추가돼 결국에는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됐습니다.

     

    초창기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가 받은 상은 고작 월계수로 만든 관이 전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금도 추가됐습니다. 가장 유명한 올림픽 선수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톤 출신인 밀로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536년부터 레슬링 경기에서 무려 6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던 그는 독특한 세레모니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숨을 참아 정맥이 부풀어 오르게 하는 방법으로 머리끈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올림픽은 또 종교적 의미도 지녔기 때문에 올림픽이 열리는 한 달 동안 그리스 모든 도시들이 휴전을 선포했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그리스였지만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만큼은 서로가 평화롭게 교류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리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이 공동체 의식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올림픽은 거의 1200년간 명맥을 유지하다가 서기 393년이 되서야 로마 황제에 의해 폐지됐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또 유독 종교적인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뭔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탁소를 찾아가 신의 뜻을 묻곤 했습니다. 그리스 본토와 식민지에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미래를 점치는 신탁소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신탁소로는 델포이와 도도네 그리고 리비아의 암몬 신탁소가 있었는데 신탁소마다 신탁을 내리는 고유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델포의 무녀들은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를 마시고 환각 상태에서 예언을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도도대의 무녀들은 공중에 매달아 놓은 채찍이 가마솥을 건드릴 때 나는 소리를 듣고 신탁을 내렸다고 합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처음 신탁소가 생긴 경위도 이집트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납치된 두 명의 이집트 부녀가 각각 도도네와 리비아에 팔려갔고 그곳에 처음으로 신탁소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생긴 이유가 어떻든간에 신탁수는 그리스에서 대히트를 쳤습니다. 얼마 안 돼 미래가 불안한 시민들뿐 아니라 도시의 중대사를 결정하려고 고위 관료들까지 신탁소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좀 더 호의적인 신탁을 듣기 위해 되도록 많은 재물을 신탁소에 바쳤고 이 때문에 신탁수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델포이의 신탁소가 가장 큰 명성을 얻었는데 그렇게 된 계기에는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있었습니다.

     

    크로이소스는 델포이의 사자를 보내 자신이 페르시아를 먼저 공격할지를 물어봤습니다. 델포이에서는 이런 신탁을 내렸다고 합니다. 크로이 소스가 할리스 강을 건너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대제국이 무너질 것이다. 신탁을 듣고 승리를 장담한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크로이소스의 패배였고 리디아는 페르시아에 멸망하고 맙니다.

     

    결국 무너진 대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의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포인은 두루뭉실한 신탁을 내리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틀렸다고 하기에도 애매해서 어쨌든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신탁소에 많은 재물을 바치기만 하면 원하는 신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탁소가 정치적 목적에 이용된다는 의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암흑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는 여러 도시들이 등장했지만 그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도시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였습니다.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이 세운 도시로 알려졌습니다. 신화 속 인물인 라켓 다이몬이 스파르타를 건국했다 해서 스파르타는 별칭인 라케다이몬으로도 불렸습니다. 참고로 라케다이문의 첫 글자인 람다는 스파르타의 상징이 됐습니다.

     

    스파르타는 2명의 왕의 다스리는 독특한 통치 체제를 갖고 있었는데 헤로도토스는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먼 옛날 스파르타의 왕비가 쌍둥이를 낳는데 둘이 너무 똑같이 생겨서 도무지 누가 장자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이 델포이를 찾아가 어떻게 할지를 묻자 델포이는 아이를 둘다 왕으로 삼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 명의 왕이 스파르타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기원전 1100년경에 등장한 도리아인은 스파르타를 기점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에 위치한 라코니아를 정복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정복한 피 지배층을 페리오이코이와 헬롯 두 가지 신분으로 나눴습니다. 먼저 페리오이코이는 대부분 같은 도리아인들로 스파르타의 복종하는 한 어느 정도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됐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 신분이었던 헬롯은 노예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노예 표식으로 가죽옷만 입어야 했고 생산물의 절반을 스파르타에 받쳐야 했습니다. 게다가 스파르타인이 아무 이유 없이 헬롯을 죽인다 해도 죄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기원전 730년 스파르타는 라코니아에 만족하지 않고 서쪽에 메세니아 지역마저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스파르타는 도시 국가로는 예외적으로 드넓은 영토와 농경지대를 확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스파르타 인구는 대략 8000명에서 1만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정복된 메세니아로부터 수만 명이 새롭게 헬롯 인구에 추가되면서 헬롯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스파르타 시민과 페리호이코이 그리고 헬롯의 비율은 1대 7대 16 정도였다고 합니다. 페리오이코이와 헬롯이 마음만 먹는다면 스파르타인들을 압도할 수도 있는 기형적인 인구 격차였습니다.

     

    실제로 얼마 후 헬롯들은 스파르타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스파르타는 멸망할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스파르타인들에게 깊은 경각심을 심어줬습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리쿠르고스였습니다.

     

    리코르고스에 대한 기록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기원전 700년경의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그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스파르타의 왕이 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죽은 형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왕비가 아들을 낳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리쿠르고스는 미련 없이 조카에게 왕이 자리를 물려주고는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크레타와 이집트뿐 아니라 그 당시에는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던 스페인과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까지 여행하면서 식견을 넓혔습니다. 리쿠르고스는 그가 방문한 나라들의 사회 구조를 비교 관찰했는데 크레타에서는 여러 정치제도를 공부했고 이집트에서는 엄격한 계급제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리쿠르고스는 자기가 배운 걸 어떻게 스파르타에 적용할지를 궁리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파르타에서는 사람을 보내 리크루고스에게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리쿠르고스가 왕좌에 있었던 건 단 8개월 뿐이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그의 지도력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향 스파르타에 돌아온 리쿠르고스는 정권을 위임받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원로원을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민들 중에서 28명의 원료를 뽑았고 이들은 2명의 왕과 함께 3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이루었습니다. 28명의 원로들은 한편으로는 왕을 도와 민중의 힘을 눌렀고 또 한편으로는 민중의 편에서 왕의 독재를 막았습니다. 시민들로 구성된 민회는 발언권이 없었고 단지 원로원에서 내놓은 안건을 결의하는 권한만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민회에서는 에포로서라 불리는 5명의 감독관을 둬 원로원을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파르타는 왕정과 과두정 그리고 민주정이 뒤섞인 복잡한 제도를 갖게 됩니다.

     

    이런 정치 체제의 단점은 결정이 느리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안 그래도 왕이 두 명이어서 결정이 느린 걸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원로들과 감독관까지 정치에 가세하자 결정은 더더욱 느려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스파르타에서는 안건이 있을 때마다 신탁소에 결정을 따르는 경우가 유독 많았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파르타의 경제 체제 마저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리크루거스는 먼저 빈부격차를 없애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토지를 모두 거둬들인 다음 균등하게 땅을 재분배했습니다. 리쿠르고스는 또 사람들의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금화와 은화를 폐지하고 철 화폐만 사용하게 했습니다. 철 화폐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돈을 보관하려면 큰 방이 필요했고 화폐를 운반하는데도 여러 마리 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타에는 도둑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시민들의 도덕 수준이 높아져서 라기보다는 정말 훔칠게 아무것도 없어서였습니다.

     

    리쿠르고스가 평등한 부의 분배를 통해 사치와 사회 불평등을 없애려고 했지만 이로 인해 시민들의 생활수준마저 평등하게 하락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느날 리쿠르고스가 공회장에 나왔을 때 그에게 불만을 품은 어떤 청년이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몽둥이로 내리쳤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한쪽 눈에 시력마저 잃게 됩니다. 하지만 리쿠로고스는 청년에게 벌을 내리는 대신 그를 하인으로 삼아 집안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가까이서 리코르고스를 지켜보게 된 청년은 그의 부지런하고 온화한 성품에 반해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리쿠르고스는 너그럽고 사람 좋기로 유명했고 이런 인간적 매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쿠르고스 조차도 헬롯에 대해서 만큼은 무자비했습니다. 리크르고스는 크립티아 법을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법은 헬롯들이 노예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스파르타인이 하루에 한 번씩 헬롯을 때려야 하며 설령 헬롯을 죽인다 해도 죄가 아니라는 법이었습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헬롯은 이 법으로 인해 평생을 공포에 따라 하였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유독 헬롯에게 잔인할 정도로 가혹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헬롯을 일부러 취하게 만든 다음 광장으로 끌고 나가 온갖 모욕을 줬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인들은 가끔 용감하게 싸운 헬롯을 자유인으로 풀어주곤 했는데 자유인이 된 헬롯에게 화관을 씌우고 여러 신전을 참배하게 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행사를 마치고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헬롯이 2000명이 넘는다는 겁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는 리크루고스의 온화한 성품으로 볼 때 그가 그런 악법을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리쿠르고스의 개혁들 중 스파르타의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것은 아고게라 불리는 스파르타시 교육이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검사관에게 보여야 했는데 만약 장애가 있거나 건강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면 절벽 위에 떨어뜨려 죽였습니다. 남자아이가 7살이 되면 집단 합숙훈련이 시작되는데 이때 이들은 강해져야 한다는 명분하에 온갖 학대와 가혹행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12살이 되면 속옷도 없이 단 한 벌에 옷만 줘 추위를 견뎌야 했고 목욕도 1년에 단 한 번만 허락됐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항상 부족한 양의 식사만 주어졌는데 키가 크려면 음식을 조금만 먹어야 한다는 잘못된 속설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음식을 훔쳐야 했습니다. 이런 도둑질은 묵인되지만 만약 들키는 경우 도둑질이 서툴다는 이유로 혹독한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스파르타인이 20살이 되면 어른이 되기 위한 일종의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이때 청년은 산에 버려져 무기와 방패만 갖고 7일 동안을 홀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 성인식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서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 생활이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어른이 된 스파르타인들은 15명 정도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공동 식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모임은 군사훈련에 연장이어서 그 누구도 공동식사에 불참할 수 없었습니다.

     

    공동 식사하면 스파르타인의 주식인 검은 스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돼지 피로 만든 검은 스프는 끔찍하게 맛이 없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스파르타인이 전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도 살아서 검은 스프를 먹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나아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어진 병영생활과 군사훈련으로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로 거듭났고 스파르타는 가공할 만한 군대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역량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는지 스파르타인이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가 새로 건설한 스파르타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지 못했고 도시 자체가 하나의 군대 내무방 같았다. 스파르타인들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리쿠르고스 본인은 스파르타의 이런 모습에 크게 만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날 리쿠르고스는 시민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지금 쓰고 있는 법을 고치지 않고 잘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델포이로 향했습니다. 델포이 신전에 도착한 리쿠르고스는 법률이 잘 만들어졌으며 그의 정책으로 나라 이름이 더욱 높아질 거라는 신탁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원하는 답변을들은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로 돌아가는 대신 음식을 끊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그가 만든 법률이 계속되기를 바래서였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그의 죽음을 숭고하게 여겼고 안 그래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던 리쿠르고스의 우상화가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램대로 리쿠르고스의 법률은 무려 500년간 그대로 지속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법률이 갖고 있던 여러 병폐 또한 고착화됐습니다. 리크르고스의 관점에서 시민은 국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개인의 희생도 정당화되는 가혹한 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게다가 시민들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던 페리호이코이와 헬롯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헬롯은 스파르타인들을 지독하게 미워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테네 출신의 역사가 크세노포는 헬롯이 느꼈던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스파르타인들을 산 채로 잡아먹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그리 멀지 않는 동쪽 아티카에서는 아테네가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