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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테베 코린토스 역사와 아테네 민주정 시대

     

     

    테베

    암흑 시대가 끝난 그리스에는 폴리스라 불리는 많은 도시 국가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폴리스는 성벽으로 둘러싸여진 도시뿐 아니라 그 주변의 농촌과 다양한 정착촌을 포함했습니다. 폴리스 인구는 시민의 가족과 노예 그리고 외국인의 수를 모두 합쳐 대략 4만에서 5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성기의 아테네는 30만의 인구를 가졌고 스파르타 인구는 그보다 많은 40만 정도였을 거로 추정됩니다. 그리스의 폴리스가 세워진 때는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아테네와 테베 그리고 코린토스가 건국된 시기는 까마득히 먼 옛날인 미케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도시들의 초창기 역사는 많은 부분 신화에 둘러싸였지만 그 속에서 조금이나마 역사적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중부 보이오티아에 위치한 테베는 신화 속 인물인 카드모스가 건설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페니키아의 왕자로 제우스에게 납치된 여동생 에어로파를 찾기 위해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의 처음 알파벳을 전파한 이도 카드모스였다고 합니다. 카드모스는 여동생을 찾아 가진 고생을 했지만 어디서도 여동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카드모습 앞에 커다란 용이 나타났습니다. 카드모스는 혈투 끝에 용을 죽일 수 있었고 그 자리에 도시 하나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가 테베였습니다.

     

    테베는 그리스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였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비견될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역사에서 테베는 커다란 사고를 치게 됩니다. 테베에서 남쪽으로는 코린토스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코린토스를 세운 인물은 시시포스였다고 합니다. 시시포스는 머리가 좋아서 신들에게 온갖 골탕을 먹이고도 꾀를 써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죽어서는 신들을 속인 죄로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바위가 정상에서 다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노동을 영원히 반복해야 했습니다.

     

     

    코린토스

    코린토스는 남부 그리스와 북부 그리스를 연결하는 좁은 지역에 위치한 요충지였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들은 그리스 남단을 돌아가는 대신 코린토스에 화물을 내려놓고 지역 반대쪽에 있는 다른 배에 다시 그 화물을 싣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이로 인해 코린토스는 판매세와 입항세로 많은 수입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코린토스는 무역 중심지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고 자연스럽게 배 건조 기술도 발달했습니다. 그 덕분에 코렌토스는 많은 도시들로부터 선박 건조를 의뢰받았고 여기서도 추가 수입이 발생했습니다.

     

    코린토스는 또 뛰어난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코린토스의 도자기는 코린토스가 보유한 무역망을 통해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테베와 코린토스하면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오이디푸스입니다. 신화 속 인물인 오이디포스는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라이오스 왕이 델포이에 들렸을 때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거라는 무시무시한 신탁을 듣게 됩니다. 깜짝 놀란 라이오스는 신화를 시켜 오이디푸스를 죽이겠지만 차마 아기를 죽일 수 없었던 신화는 그를 사네이는 나무에 매달아 났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던 양치기에게 발견됐고 양치기는 그를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데려다줬습니다. 마침 폴리보스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를 아들로 삼기로 합니다. 그렇게 코린토스의 왕자가 된 오이디푸스는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폴리보스 왕의 친아들인지 의심이 생긴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듣기 위해 델포이로 갔습니다. 하지만 델포이에서는 원하는 대답 대신 그가 아버지를 죽일 것이며 어머니와 결혼할 거라는 충격적인 예언을 했습니다.

     

    여전히 폴리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가 친부모라고 생각한 오이디푸스는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 코린토스를 영역 떠나기로 합니다.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자신의 친아버지인 라이오스 왕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 몰랐던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과 시비가 붙었고 싸움 끝에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살해하게 됩니다. 마침 테베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태백 이오카스테 왕비는 스핑크스를 없애주는 사람에게 테베 왕위를 주고 자신은 그의 아내가 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나서서 스핑크스를 죽이자 이오카스텐의 약속대로 그와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오이디푸스가 커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는 결혼한다는 신탁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와 함께 테베를 다스리면서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오이디푸스를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모두 드러나게 됩니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오이디푸스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오이디포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작품에서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테베에서 추방돼 떠돌아다니다가 아테네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죽기 전 오이디푸스는 아테네 왕의 환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헤라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테세우스였습니다.

     

    테세우스는 생전에 수많은 악당과 괴물을 물리쳤다고 알려졌는데 특히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걸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 영웅 집에서는 미노타우루스에 대해 신화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미노타우루스는 사실 괴물이 아니라 미노스 왕의 부하였던 타우루스 장군이었다는 겁니다. 그는 성격이 오만하고 포악해서 아테네에서 온 소년과 소녀들을 심하게 학대했고 미노스 왕도 그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타우루스가 운동 경기에서 여러 번 우승했을 정도로 힘이 장사여서 미노스 왕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테스세우스가 나타나 타우루스를 물리쳐주자 미노스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아테네 아이들을 테세우스에게 돌려줬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영웅이 됐지만 그가 아테네 시조로 추앙받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테세우스는 먼저 아티카 여러 지역이 흩어져 있던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아테네라는 이름하에 결집하게 했습니다. 테세우스는 스스로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민주정치를 제안했습니다. 즉 자기는 다만 전쟁과 법률에만 관여할 것이며 다른 분야는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게 관여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테세우스를 가리켜 민주정치를 펴기 위해 왕의 자리를 내던진 최초의 인물이라 평했습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테세우스의 끝도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테스우스에 불만을 가진 아테네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쫓겨난 테세우스는 아테네를 저주하다 절벽 아래로 추락사였다고 합니다. 테세우스가 먼 옛날인 기원전 13세기에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테세우스가 민주정을 창설했다는 이야기도 후대 각색 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원전 700년경 그리스는 신화 시대에서 역사의 시대로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왕의 권한은 귀족들에게 서서히 넘어갔습니다. 아테네 성인 남자는 민회에 참석할 수 있었고 여기서 행정관을 선출했는데 아르콘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민회가 아르콘을 선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는데다 선출자들도 보통 귀족들이라 민주정보다는 귀족정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던 중 아테네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기원전 632년 킬론이란 인물이 아테네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킬론은 올림픽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젊은 귀족으로 메가라의 통치자 태아 게네스의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킬러는 테아게네스가 보내준 군대와 함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습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시내에 있는 높은 언덕으로 수비하기에 유리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킬론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외국 군대의 반감을 느낀 시민들이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테네의 명문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이 공격을 주도했는데 이들은 신전의 피신해 있던 킬론과 추종세력을 끝까지 쫓아가 죽였습니다. 그런데 신전 안에서는 살인 행위가 엄격하게 금지됐었기 때문에 쿠데타를 진압한 알크메오니다이 사람들까지 모두 추방됐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가 부각됐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많은 사회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부의 양극화였습니다. 이 시기에 농경지 대부분이 소수의 부자들에게만 집중돼 있었습니다. 만약 흉년이라도 들면 농민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부자들에게 빚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600년경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농민들의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진 빚 때문에 수확한 것에 6분의 1을 받쳐 했고 빚을 갚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부자들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자식까지 노예로 파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솔론

    이대로라면 언제라도 귀족과 평민간의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아테네 귀족들은 킬론의 반란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힘을 목격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솔론이었습니다. 그리스 일곱 현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솔론은 왕족 출신이었지만 집안은 의외로 부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년이 된 솔론는 돈을 벌기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중에 솔론은 각국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면서 지식과 경험을 쌓았습니다. 특히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만나 행복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솔론과 교류한 또 한 명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였습니다. 솔론과 탈레스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솔론이 탈레스를 찾아가 왜 결혼해서 자식을 갖지 않느냐고 묻자 탈레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솔론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아테네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솔론이 머리를 감싸면서 통곡하자 곁에 있던 탈레스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지 않는 겁니다. 당신처럼 침착하신 분도 이렇게 슬퍼하시니 말입니다.

     

    방금 소식은 제가 꾸민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자식을 얻기도 전에 죽을까 두려워서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면서 탈레스를 비판했습니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로 돌아온 솔론이 아르콘에 선출됐습니다. 이때 부자들은 솔론의 부유함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솔론의 정의감 때문에 각자 솔론이 자기 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솔론에게 아테네가 처한 위기를 타개할 비상대권이 주어졌습니다.

     

    솔론의 측근들은 이 기회에 왕이 되라고 권했지만 솔론은 왕이 되는 건 영광스럽지만 다음날에 구렁에 빠져 가뭄까지 망치는 일이라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솔론이 만든 최초의 법은 빚을 진 아테네인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걸 금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솔론은 또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하락시키는 방법으로 빈민들의 부채를 상당 부분 덜어줬습니다. 그렇다고 솔론이 전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빈민층은 스파르타처럼 부자들의 토지를 모두 걷어 평등하게 재분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면 그 동안 부를 쌓기 위해 드린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걸 의미했기 때문에 부자들의 강한 반발이 예상됐습니다. 게다가 부채를 탕감해 준 것만으로도 이미 부자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론은 저당잡힌 농지만 자유롭게 풀어났을뿐 토지의 재분배는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솔론의 정책은 부자와 빈민 어느 쪽의 호응도 얻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정책이 합리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솔론이 다음에 한일은 악법으로 알려진 드라콘법을 폐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라콘법은 살인지와 도둑질뿐 아니라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가벼운 죄에도 동일하게 사형을 내렸습니다. 솔론은 살인죄를 제외한 드라콘법을 모두 폐지함으로써 시민들의 숨통을 터줬습니다. 솔론이 시행한 또 다른 개혁은 금권 정치였습니다. 솔론은 출신이 아닌 소득 수준에 따라 시민들을 4가지 계급으로 나눴습니다. 연간 소득이 높은 제1 계급에서 제3계급까지는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 제4 계급은 민회에는 참석할 수 있었지만 정책을 제안할 수는 없었습니다. 겉으로 봤을 때 이 법은 부유층이 많은 귀족들에게 많은 권한을 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솔론은 법을 교묘하게 조정해서 대부분의 법안과 분쟁이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의 승인을 받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솔론은 시민들과 노동계급에 더 많은 힘을 실어준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소득에 따라 계급이 올라가는이 시스템으로 시민들은 더 많은 부를 쌓아야 할 확실한 동기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계층간의 문제뿐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의 경우 드넓은 영토를 보유한 데다 땅도 기름져서 인구의 두 배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사일은 헬롯에게 맡기고 시민들은 군사활동에만 집중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아테네가 위치한 아티카는 인구는 많은데  비해 토지는 메말라서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농업만으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솔론은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했고 시민들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 식의 기술을 배우게 했습니다. 이 밖에도 솔론은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특이한 법률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갈등이 있을 때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킨 사람은 시민권을 박탈한다는 법이었습니다. 솔론은 정치활동에 가급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중립을 지키는 건 미덕이 아니라 방관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그는 권력자들에게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는 옛 제도의 좋은 점을 그대로 두고 좋지 않은 부분을 새롭게 고치고 온순한 사람들은 설득으로 완강한 사람들은 힘으로 다스렸다. 솔론의 기억은 아테네 사회의 활력을 불어넣고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참정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로 인해 아테네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아테네는 독재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