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루스 그리스 정복
기원전 550년경 그리스가 수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서로 다투고 있을 때 동방에서 한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훗날 대왕이라 불리게 될 키루스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자로 태어난 키루스는 여러 번 죽을 위기를 겪는 등 꽤 험난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장사한 키루스는 페르시아군을 이끌고 아스티아게스가 다스리는 메디아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변방의 약소국에 불과했던 페르시아는 오랫동안 메디아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승리할 확률은 희박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스티아게스는 오랜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고 메디아의 총 사령관이었던 하르파고스도 아스티아게스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르파고스는 키루스와 싸우는 대신 군을 이끌고 키루스에게 토왕했습니다. 그 덕분에 키루스는 손쉽게 메디아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키루스의 다음 목표는 소아시아의 강국 리디아였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위협을 느낀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선제 공격해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로이소스는 오히려 역공을 받아 키루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맙니다. 짧은 시간에 메디아에어 리디아까지 정복한 페르시아는 명실상과 최강대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때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그리스 문명과 마주하게 됩니다. 키루스는 리디아를 공격하기 전에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세이는 그리스도시들의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가만히 있다가 리디아가 완전히 멸망한 뒤에야 키루스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발적으로 페르시아의 복종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키루스의 눈에 이들이 곧게 보일리 없었습니다. 키루스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무시하다가 일이 끝난 지금에서야 자기를 따르겠다고 한다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에 보고되자 이오니아 주민들은 한 곳에 모여 어떻게 할지를 논의했습니다. 하지만 따로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고 있었던 밀레토스만이 이 모임에 불참했었다고 합니다.
이오니아인들은 논의 끝에 그리스도틀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곧이어 스파르타에 도착한 이오니아의 사자가 이오니아를 구원해 줄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지만 스파르타인들은 군을 보내길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 중 명망이 높았던 라크리네스라는 인물을 키루스가 있는 사르데스에 보내기로 합니다. 사르데스에 도착한 라크리네스는 만약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공격한다면 스파르타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의미한 경고는 키루스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스파르타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키루스는 이제 이오니아를 넘어 그리스 본토까지 차지할 마음을 품게 됩니다.
다행히 키루스는 아직 바빌로니아라는 그리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적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 공략을 위해 동쪽으로 떠나면서 다른 사령관을 보내 이오니아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르파고스가 페르시아군의 지위를 맡았는데 그는 키루스에게 토왕하기 전까지 메디아 군의 총사령관을 맡았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르파고스가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은 포카이아였습니다.
포카야는 예로부터 항해술로 유명한 도시로 멀리는 스페인이에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했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포카이아인들은 배의 모든 주민들과 재산을 싣고 포카이아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포카이아인들 중 태반이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지만 무사히 살아남은 이들은 남부 이탈리아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텅 빈 포카이아를 찾은 하르파고스는 방향을 돌려 나머지 이오니아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이오니아인들은 하르파고스를 상대로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패해 페르시아의 완전히 복종하게 됩니다. 하르파고스는 이오니아에 멈추지 않고 아이올리스와 카리아에 흩어진 그리스 도시들까지 모두 정복했습니다. 이렇게 서아시아 모든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자유를 빼앗긴 이오니아인들이 슬픔에 잠겨있자 비아스라는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이오니아인들이 모두 배를 타고 사르데니아로 가서 모든 이오니아인을 위한 도시를 건설하자 그렇게 하면 세계 최대 섬에 살면서 인근 주민에게 호령하고 자유를 빼앗긴 비운을 면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캄비세스 이집트 정복
이오니아에 그대로 머물면서 자유를 되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아세의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키루스가 죽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캄비세스는 아버지로부터 지중해에서 인도해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물려받았습니다. 캄비세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이집트를 공격했습니다.
칸비세스는 이오니아와 아이홀리스인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노예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 원정에 동원됐습니다. 그런데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전에 이집트에서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집트 남부에 있는 도시 탭에 비가 내린 것이었습니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비는 별일이 아니었겠지만 탭에서만큼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비가 내린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탭에 비가 내린 사건은 심상치 않은 기상위변이자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습니다.
곧이어 페르시아군이 남아에 이집트 본토까지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평화를 누리고 있던 이집트 군은 그 동안 많은 전투로 단련된 페르시아군에 비해 전력상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집트의 파라오는 즉위한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은 프삼티크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이 밀고 내려오자 프삼티크는 정면승부를 피해 펠루시움에서 공성전을 대비했습니다. 한 동안 이집트군은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캄비세스는 전략을 바꾸기로 합니다.
예로부터 이집트인들은 고양이를 숭상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집트인이 고양이를 죽이면 사형에 처했고 만약 건물의 화제가 발생해도 사람이나 물건보다는 고양이를 먼저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은 고양이를 미라로 만들었을 정도로 고양이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카미세스는 바로 이 점을 찾아내 새로운 전략을 찾습니다. 그는 먼저 페르시아군의 방패에 고양이 모습을 한 이집트 여신의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이들 앞에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이집트인들은 고양이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서 제대로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적의 당황한 모습을 확인한 페르시아군은 이집트 군을 향해 고양이를 던져 댔고 사기가 완전히 꺾인 이집트군은 더 이상 페르시아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페르시아군이 펠루시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패배한 프삼테크는 멤피스에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페르시아의 포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캄비세스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포로가 된 프삼티크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미세스는 프삼티크에게 치욕을 주기 위해 그를 다른 이집트 귀족들과 함께 교회로 끌고 갔습니다.
얼마 후 노예의 복장을 한 왕의 딸과 귀족의 딸들이 울면서 그들의 앞을 지나가자 아버지들은 딸들을 불쌍히 여겨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프삼티크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딸들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왕의 아들이 같은 나이 또래 이집트 청년 2000명과 함께 비참한 모습으로 사형장에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걸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지만 프삼티크는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지나가고 얼마 안 돼 거지꼴을 한 어떤 노인이 우연히 이들 곁을 지나갔는데 그는 사실 프삼티크의 옛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딸을 보고도 가만히 있던 프삼티그가 이번에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옛 친구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이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캄비세스가 프삼티크에게 왜 그렇게 거지를 소중히 여기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키루스의 아드님이여 우리 집안에 일어난 불행은 슬피 울기에는 너무나 큰 불행입니다 그러나 유복한 신분에서 거지로 전락한 데다 늙어버린 저 친구의 불운은 울어줘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말들은 캄비세스와 그의 신하들은 프삼티크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때 크로이소스도 캄비세스와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적이 있어서 였는지 프삼티크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프삼티크를 가엾게 여긴 캄비세스는 처형장의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을 구해주려고 했지만 아들은 이미 처형된 뒤였습니다. 이집트를 차지한 캄비세스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남쪽 에티오피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캄비세스는 먼저 해군을 시켜 카르타고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해군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페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로 출정하는 걸 거부했습니다. 카르타우가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식민지여서 아들과 같은 도시를 공격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해군 전력 대부분을 페니키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공격을 강요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캄비세스는 카르타고 원정을 포기하였습니다. 캄비세스의 다음 목표는 에티오피아였습니다. 캄비세스는 에티오피아를 공격하기에 앞서 사신으로 가장한 스파이를 보내 에티오피아를 정탐하게 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에티오피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인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고 아름다운 인종이라 한다 모든 국민 중에서 가장 키 크고 힘이 센 자에게 왕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 페르시아에서 사신이 도착하자 에티오피아 왕은 단번에 그가 스파이라는 걸 알아봤습니다. 왕은 사신에게 활 하나를 건네면서 페르시아인이 이 정도로 큰 활을 자기처럼 손쉽게 당길 수 있을 때 에티오피아를 공격하는 편이 나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자색 의상과 황금 장식품 향유 그리고 술을 왕에게 바쳤습니다.
에티오피아 왕은 선물을 보더니 페르시아인은 인간도 가짜지만 몸에 걸치는 것도 가짜라면서 멸시했습니다. 사신이 페르시아인들의 주식은 밀로 만든 빵이라고 말하자 왕은 그런 똥 같은 음식을 주식으로 하니 페르시아인들의 수명이 짧은 것이며 에티오피아인 대부분은 고기를 주식으로 먹어 수명이 120살이라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페르시아에서 온 술만은 마음에 들어 하면서 술에서 만큼은 페르시아를 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페르시아 사신들은 에티오피아에 머무는 동안 태양의 식탁이라는 걸 구경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담당자를 정해 밤에 삶은 고기를 초원 여기저기에 늘어놓고 낮에는 누구든지 마음대로 그것을 먹게 했는데 이걸 태양의 식탁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파이의 보고를 들은 캄비세스는 크게 화를 내면서 에티오피아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너무 충동적으로 원정길에 올랐기 때문에 식량을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에 1/5도 가기 전에 식량이 바닥나고 병사들은 수송용 동물까지 잡아먹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캄비세스는 막무가내로 앞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고 병사들은 배고픔을 참으면서 진격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병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이 발생하자 그때서야 실상을 깨달은 캄비세스는 군을 후퇴시켰습니다.
하지만 군이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수의 병력을 잃은 후였습니다 비슷한시기 이집트는 아피스라는 소가 태어났습니다. 아피스는 이집트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소로 이집트인들은 아피스가 나타나자 기뻐하면서 큰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캄비세스는이 모습을 보고 이집트인들이 자신의 실패를 기뻐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격분한 캄비세스는 아피스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게 하더니 칼을 휘둘러 아피스의 넓적다리에 상처를 냈습니다. 아피스는 결국 이 상처로 죽었고 이집트인들의 축제 또한 중단됐습니다. 카미세스는 이집트에 체류하면서 이집트의 관습을 무시하는 행동을 잇삼았습니다. 그는 오래된 묘를 파헤쳐 시체를 구경했고 신전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신상을 마음껏 비웃은 다음 불태워버렸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의 이런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캄비세스가 정신 창란 증세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신앙이나 관습에 관한 것을 감히 비웃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어느 나라 사람이든 이 세상의 관습 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르라고 하면 누구라도 자기 나라 관습을 고를 것이다. 그 만큼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자기 나라 관습이 특별하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것을 비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야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캄비세스는 어렸을 때부터 신성한 병이라 불리는 간질병을 알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 육체의 병으로 인해 정신까지도 이상해졌을 거라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캄비세스가 미친 이유가 그가 저지른 악행으로 벌을 받은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점점 기행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임신한 왕비를 죽였고 별 이유도 없이 페르시아 귀족 12명을 잡아다가 머리를 아래로 해서 생매장한 일도 있었습니다. 캄비세스의 친동생이었던 스메르디스도 억울한 희생자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 중 유일하게 스메르디스만이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온 활을 당길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캄비세스는 동생을 질투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캄비세스는 스메르디스가 왕좌에 올라 그의 머리가 하늘에 닿는 꿈을 꿨습니다. 캄비세스는이 꿈을 스메르디스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의미로 해석해 그가 가장 신뢰하던 프렉사스페스를 페르시아까지 보내 스메르디스를 살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프렉사스페스는 임무를 완수해 스메르디스를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충실한 프렉사스페스도 카비세스에서의 광기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캄비세스가 프렉사스페스에게 페르시아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프렉사스페스는 백성들 사이에서 왕의 평판이 대단히 좋지만 단지 그가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칸비세스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플렉사스페스의 아들이 캄비세스에서의 술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캄비세스는 화를 들어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활로 네 아들의 심장을 맞춘다면 백성들의 말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하자. 만약 내가 실수를 한다면 백성들의 말이 진실이고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캄비세스는 활로 아들의 심장을 정확히 맞춰 죽였습니다. 캄비세스가 자기가 옳다는 걸 증명했다면서 기뻐하자 프렉사스페스는 그 누구도 이렇게 훌륭하게 맞출 수는 없을 거라면서 왕의 활 솜씨를 칭찬했습니다. 그 와중에 페르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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