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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 동기

     

     

    스파르타 국가의 힘

    기원전 508년 아테네에서는 클레이 스테네스가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단행한 개혁을 통해 아테네는 전보다 훨씬 더 부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리스 최강대국이 스파르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해 주변 지역을 굴복시켰고 기원전 500년경에는 아르고스를 제외한 펠레폰네소스 반도 전체와 펠레폰네소스 동맹이라 불리는 군사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이후 코린토스와 테베도 펠레폰네소스 동맹에 참여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전쟁시 동맹국의 맹주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제 아무리 아테네라 할지라도 스파르타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아테네는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인 페르시아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아테네에서 보낸 사절단이 사르데스에 도착하자 그곳에 총독이었던 아르타 프레네스는 그들이 누구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한 번도 아테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아르타프레네스는 사신들에게 만약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싶다면 다리우스에게 땅과 물을 바치라고 말했습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지만 사절단은 일단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아테네로 귀국한 그들은 격렬한 비난을 부딪혀야 했습니다. 한편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 메네스는 아테네에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클레오메네스 입장에서는 일부러 군을 일으켜 아테네를 독재자로부터 해방했는데 그에 대한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받지 못하자 서운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격자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연한 계기로 알크메우니다의 가문이 델포이의 무녀를 매수해 스파르타를 속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클레오 메네스는 마침내 공격을 결심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게 앞서 아테네에 참주였던 히피아스를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동맹국에서 사절을 초청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맹국 여러분 우리는 거짓 계시에 놀아나 우리의 친구 히피아스를 아테네에서 추방했습니다. 그 결과 아테네는 배응망덕한 민중의 차지가 됐습니다. 우리는 이런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여기 있는 히피아스와 여러분을 모신 것입니다.

     

    연합군을 편성해 히피아스를 아테네로 복귀시키고 그가 빼앗긴 것을 되찾아 줍시다. 동맹국 대표 대부분은 스파르타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때 코린토스의 대표였던 소클레스가 용기를 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여러분 만일 그대들이 그리스 국가의 독재자를 펴려고 한다면 이보다 부당하고 잔인한 행위는 없을 겁니다. 진심으로 독재자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스파르타가 먼저 솔선수범해 독재자를 세워 보시오.

     

    그런 다음에야 다른 나라에도 독재제를 시도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독재자가 나타나지 않게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는 귀국이 다른 나라의 그런 제도를 시행하는 건 부당합니다. 소클레스는 그러면서 과거 코린토스가 참주 페리안드로스의 폭정으로 얼마나 고통받았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소클래스에 이어 다른 동맹국들도 전쟁에 반대하자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단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히피아스는 다시 아시아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히피아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히피아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르데스의 총독 아르파 프레네스를 설득해 아테네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후 아르타 프레네스는 아테네의 히피아스를 복귀시킬 거 요구했지만 아테네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습니다.

     

    밀레토스의 페르시아 공격

    그즈음에 밀레토스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밀레토스가 반란을 일으킨 배경에는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 고라스가 있었습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전에 아르타 프레네스를 설득해 낙소스 섬을 공격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낙소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는 아리스타 고레스에게 전쟁 비용을 물리고 원정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밀레토스의 지배권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아리스타고라스는 고민 끝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밀레토스만으로는 역부족이라 판단한 그는 이오니아 전체를 반란을 끌어들이기로 합니다. 그는 먼저 민심을 얻기 위해 민주제를 실시했고 여러 도시에서 독재자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아리스타 고라스의 선동에 넘어간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들이 하나둘씩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페르시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이오니아는 전통적으로 군사력이 약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타고라스는 강력한 동맹국을 찾아 직접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스파르타였습니다. 클레오 메네스를 받는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인들이 페르시아 억압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스파르타라면 페르시아를 상대로도 쉽게 이길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동판에 새긴 세계 지도를 꺼내 페르시아가 가진 엄청난 부와 풍부한 자원 모두를 스파르타가 차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클레오 메네스가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이오니아 해안에서 페르시아의 왕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묻자 아리스타고라스는 수도까지 3개월이 걸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클레오 메네스는 스파르타가 그렇게 먼 곳까지 원정을 떠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궁까지 따라간 아리스타고라스는 절박한 심정으로 계속해서 왕을 설득했습니다. 그가 50 탈란톤이라는 금액을 제시하면서 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클레오메데스의 8, 9살 정도 되는 외동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그만 자리를 뜨시지요. 안 그러면이 외국인에게 매수되고 말 겁니다. 딸의 말이 옳다고 여긴 크레오메네스는 대화를 마쳤고 아리스타고라스는 스파르타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오니아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그리스 내에서 스파르타 다음과는 강대국이었던 아테네로 향했습니다. 민회의 출석한 아리스타고라스는 클레오 메네스에게 말한 것과 같은 논리로 아테네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밀레토스가 원래는 아테네 식민지였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모국인 아테네가 당연히 밀레토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네인들을 설득해 군사원조를 약속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이 결정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인지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리스타 고라스가 스파르타의 클레오 메네스 한 사람을 속일 수 없었는데 3만의 아테네인을 상대로 성공한 걸 보면 한 사람을 속이기보다 많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더 쉬운 것 같다. 곧 이어 아테네가 보낸 20척의 함대와 에레트리아가 파견한 다섯척의 배가 이오니아에 도착했습니다. 지난 날 에레트리아가 이웃도시 칼키스와 싸우고 있을 때 밀레토스가 지원군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에르트리아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밀레토스를 돕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499년 그리스로부터 동맹군이 도착하자 이오니아군은 즉시 페르시아 총독이 있는 사르데스로 진격했습니다. 이때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이 직접 군을 지휘하는 대신 자기 형제인 카로피 도스에게 군을 맡겼습니다. 사르데스에 도착한 이오니아군은 빠르게 도시를 제압했습니다. 하지만 청도 아르타프레네가 여전히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아크로폴리스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총독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오니아군에 의도치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르데스의 집 대부분은 갈대로 만들어졌었는데 병사 한 명이 집 한 채 불을 지르자 삽시간에 온 도시에 화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유서 깊은 도시 사르데스가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사건은 페르시아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얼마 후 페르시아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오니아군은 별다른 소득도 없이 사르데스에서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은 맹렬하게 이오니아군을 추격해 에페소스에서 이들을 따라잡았습니다. 곧이어 양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과는 이오니아군의 참패했습니다. 이 전투로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테네 군도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얼마 뒤 사르데스가 이오니아와 아테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린 일이 다리우스에게 보고됐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다리우스는 아테네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리우스는 복수를 다짐하면서 식사할 때마다 하인을 시켜 전화 아테네인을 잊지 마십시오 라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하게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페르시아의 응징은 빠르고 철저했습니다. 이오니아에 도착한 페르시아군은 거의 하루에 한 개꼴로 이오니아와 아이홀리스 그리고 카리아의 도시들을 차례차례 정복해 나갔습니다. 밀레토스와 동맹국도 군을 파견했지만 페르시아군의 상대로 매번 패배를 맛봤습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아리스타고라스는 비겁하게도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밀레토스를 떠나 트라키아에 도착했는데 얼마 후 그곳 주민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의 대군이 바다와 육지를 통해 밀레토스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페르시아가 600척의 함대를 동원했던 것에 비해 이오니아 연합군의 함산수는 353척이었습니다. 하지만이 전투에서도 패배한 이오니아군은 함선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반란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밀레토스의 성인 남자 대부분을 살해했고 여자는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밀레토스는 폐허가 됐습니다. 밀레토스뿐 아니라 이오니아의 많은 도시와 섬들이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특히 페르시아군은 섬을 점령할 때마다 예인 방식으로 주민들을 사냥했다고 합니다. 예인 방식은 병사들이 손을 잡고 북쪽 해안에서 남쪽 해안까지 내려오면서 주민들을 사냥하는 걸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완전히 페르시아에 굴복하게 됩니다. 아리스타고라스가 반란을 일으킨지 6년 만에 일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리스 본토로 진격했습니다. 이때 마르도니오스라는 젊은 장군이 페르시아군을 지휘했는데 그는 다리우스 왕의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1차 목표는 이오니아 반란을 가담한 에레트리아와 아테네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 도시는 전쟁의 명분에 불과했고 그의 진짜 목표는 그리스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레스 폰터스 해협을 건너 유럽에 들어선 마르도니우스는 육상부대로 마케도니아를 공격했고 해군으로는 타소스 섬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이 아토스 반도 부근을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많은 수의 함선이 침몰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약 300척의 함선이 파괴됐고 사망자만 2만명이 넘었었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자 마르도니우스는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