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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페르시아, 아테네 독재제와 민주정치 도입 과정

     

     

     

    페르시아 독재제 다리우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가 이집트에 머물고 있을 때 페르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인물은 마고스 사제 계급에 속하는 파티제이테스였습니다. 그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공교롭게 그는 죽은 캄비세스 동생 스메르디스와 똑같이 생겼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헤르도토스에 따르면 그의 이름도 같은 스메르디스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캄피세스가 동생의 죽음을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스메르디스가 죽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파티제이테스는 이 점을 노려 그의 동생 스메르디스를 왕위에 앉힌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캄비세스에게 들려오자 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둘러 말 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칼집에서 떨어진 칼이 그의 허벅지에 꽂힌 일이 발생했습니다. 캄비세스는 이때 생긴 상처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캄비세스는 죽기 전에 그가 동생을 죽인 걸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권력은 이미 마고스 형제에게로 넘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스메르디스와 그의 형제는 그 후 8개월간 큰 무리 없이 페르시아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다 오타네스라는 귀족이 왕의 정체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오타네스는 스메르디스를 몰아내기 위해 가장 믿을 만한 동료 6명을 모았습니다. 얼마 후 페르시아 총독의 아들이 도착하자 이들은 그도 동지로 가담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훗날 왕이 오르게 되는 다리우스였습니다. 한편 왕의 행세를 하고 있던 마고스 사제들은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프렉사스페스에게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프렉사스페스의 아들이 캄비세스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가 기꺼이 자기 편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상대로 프렉사스페스가 설득에 넘어오자 그들은 프렉사스페스에게 성로에 올라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스메르디스를 죽인 적이 없으며 지금 왕이야말로 키루스의 아들임을 공표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성 위에 오른 프렉사스페스의 발언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그가 캄비세스의 명령에 따라 스메르디스를 살해했으며 지금 왕이 된 인물은 가짜라는 사실을 실토한 것이었습니다.

     

    말을 모두 마친 프랙사스 패스는 성 밖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바로 그때 오타네스와 동료들이 왕궁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이들이 프렉사스페스를 만나 공모한 적이 없음에도 마치 서로 시간을 맞춘듯한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막고 있던 황간들을 죽이고 왕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환관들이 큰 소리를 냈기 때문에 가짜 왕과 그의 형제는 각각 벽에 걸린 활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곧바로 이들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창을 들고 있던 마고스는 2명에게 부상을 입히면서 힘껏 싸웠지만 결국 수적 열쇠를 이기지 못하고 제압당했습니다. 또 다른 마고스는 습격자들이 접근해 활이 무용지물이 되자 다른 방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때 다리우스와 고브리아스가 그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브리아스가 마고소와 뒤엉켜 싸우는 동안 다리우스가 옆에서 있었는데 방안이 너무 어두워서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고브리아스가 누가 죽든지 걱정하지 말고 아무나 찌르라고 말하자 다리우스는 용기를 내 칼을 휘둘렀습니다.

     

    운 좋게도 다리우스가 찌른 사람은 동료가 아닌 마구스였습니다. 가짜왕이 죽자 페르시아인들은 기뻐하면서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타네스와 일곱 동료들은 가짜 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왕의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동료들 중 누군가를 왕으로 정해야 했습니다. 헤르도토스에 따르면 이들은 누가 왕위에 오를지를 정하기 전에 앞으로 페르시아를 어떻게 지배할지를 논의했다고 합니다. 이때 오타네스는 놀랍게도 페르시아의 모두가 국정에 참여하는 민주정을 제의했습니다.

     

    그는 누군가 한 명을 정해 독재자로 만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캄비세스 왕이 어떤 폭정을 했는지 알고 있고 마고스의 폭정도 직접 겪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도 한번 군주가 되면 초심을 잃기 마련이다. 현재 영화로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타고난 질투심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약점 때문에 독재자는 가진 악덕을 지니게 된다. 그는 요직에 앉은 자들을 질투하고 시민들 중 가장 천한 자들을 즐겨 총회한다.

     

    독재자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을 파괴하고 여자를 범하고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하지만 대중에 의한 통치는 만민 평등권이라는 아름다운 명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독재제를 버리고 대중의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이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메가비 조스가 소수의 엘리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과도정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재자를 폐지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주권을 민중에게 맡기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대중은 어리석고 교활한 자들이다. 이들은 무엇이 정당한지 배운 일도 없고 스스로 깨닫는 능력 또한 없다.

     

    마치 세차기 흐르는 강물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나랏일을 밀어붙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해 그들에게 주권을 줘야 한다. 가장 뛰어난 정책이 가장 뛰어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선 다리우스는 독재제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민주정과 과주정보다 독재자가 훨씬 뛰어난 제도라고 확신한다 뛰어난 한 사람의 통치보다 더 뛰어난 정치체제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두정을 하면 자연스럽게 내분이 생길 것이고 결국 한 명이 다스리는 독재자의 일 것이다.

     

    민주정이 시행될 경우 부패와 위법행위가 생기는 걸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악을 행하는 이들은 서로와 결탁하게 마련이다. 이 악행은 한 인물이 나타나 이들을 처단하기까지 되풀이될 것이고 결국이 영웅은 추앙을 받아 독재자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 건 민주정도 과도정도 아닌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군주정이라는 제도를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결론이 나지 않자 투표를 통해 어떤 정치제도를 선택할지를 정하기로 합니다. 그 결과 7명 중에 4명이 군주정을 유지하는 것에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민주정을 주장했던 오타네스는 왕이 되는 걸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와 그의 자손이 그 누구의 집에도 받지 않는다는 특혜를 얻었습니다. 남은 6명은 누가 왕이 될지를 놓고 내기를 했습니다. 모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가 해가 뜰 무렵 가장 먼저 소리를 낸 말의 주인이 왕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부의 도움을 받은 다리우스의 말이 가장 먼저 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리우스가 페르시아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키루스의 후손이 아니어서 정통성을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우스가 왕이 되고 얼마 안 돼 바빌로니아와 이집트든 제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다리우스는 즉시 군을 동원해 반란을 모두 진압했고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다리우스는 오랫동안 페르시아를 괴롭혔던 스키타이로 원정을 떠나기로 합니다.

     

    다리우스는 직접 군을 이끌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스키타의 영토 깊숙히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스키타인들이 정면 승부를 피해 페르시아군의 보급품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자 다리우스는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원정으로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아시아를 떠나 유럽의 발을 딛게 됩니다.

     

     

    아테네 민주정치 크레이스 테네스

    다리우스가 왕이 오르기 5년 전인 기원전 527년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아테네를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적이었던 알크메오니다스의 가문은 아테네에서 참주를 몰아내기 위해 열심히 물밑 작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알크메오니다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은 참주를 몰아낼 방법으로 스파르타의 힘을 빌리기로 합니다. 알크메오니다 가문은 먼저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델포이 신전을 매수했습니다 이들의 무녀에게 스파르타인이 신탁을 받으러 올 때마다 아테네를 해방하려는 계시를 주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델포이에서 매번 같은 내용의 신탁을 받자 스파르타인들은 결국 아테네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기원전 510년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 메네스가 중무장 보병을 이끌고 아테네로 진군했습니다. 아테네 병사들은 동맹이었던 테살리아 기병과 함께 전장에 나섰지만 그들의 상대는 그리스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스파르타였습니다. 결국 전투에서 패한 히피아스는 아테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무려 50년간 이어졌던 참주정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참주정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었습니다.

     

    히피아스의 뒤를 이어 아테네 정권을 잡은 인물은 알크메우니다스 가문에 클레이스테네스와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사고라스였습니다. 그런데 이사고라스가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 메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힘을 합쳐 클레이스테네스를 아테네에서 추방했습니다. 이사고라스를 전면에 내세워 민주제를 폐지하고 아테네에 스파르타와 비슷한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분노한 아테네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클레오 메네스와 이사고라스는 도시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이후 추방됐던 클레이스테네스가 돌아와 아테네의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크레이스테네스는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것은 부족제를 재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아테네 도시부와 해안부 그리고 내륙부를 각각 10개씩 총 30개의 구역으로 잘게 쪼갰습니다. 이렇게 나뉜 30개의 구역은 다시 마구잡이로 3개의 구역씩 합쳐져 10개의 부족이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에서 떨어져 나온 지역들을 합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셈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지역과 혈연으로 갈라진 여러 파벌간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존에 이해관계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시민들 간의 평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지역이나 계층으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관심은 공익에 맞춰졌을 겁니다. 게다가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들에게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투표를 유도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그의 또 다른 업적은 군사력 증강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테네 시민 모두에게 호적을 부여해 소재지를 명확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압도하는 3만의 병력을 병역 해당자로 등록시킬 수 있었습니다. 클래스스테네스는 또 도편 추방제를 도입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도표는 도기의 파편으로 시민들은 도편에 아테네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총 6천 표가 넘으면 10년간 추방하는 제도였습니다. 이 투표는 또 다시 아테네 참주가 출연하는 것을 막는 용도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정적을 추방하는 목적으로 악용되면서 도편 추방제는 폐지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