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식민지 개척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본토를 떠나 식민지를 개척한 건 기원전 9세기 무렵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인들은 주로 이오니아 지방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식민 활동이 시작된 기원전 750년부터 향후 200년간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 그리스의 식민지가 세워졌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인들만큼 활발한 식민 활동을 벌인 나라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가 유일했습니다. 잘 알려진 식민지로는 아테네가 세운 나폴리 코린토스가 세운 시라코사 그리고 스파르타가 세운 타란토가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 식민지들이 무역 기지의 성격을 뛰었고 가끔 정치적인 이유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식민지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 건설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암흑시대가 끝나자 인구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가뜩이나 농경지가 부족했던 그리스에서는 식량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 건설에 동원됐습니다. 식민지가 세워지는 과정은 꽤 험난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가 아무리 옛날이었다 해도 허허벌판이 아닌 대부분의 땅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입지 조건이 좋을수록 원주민들의 저항도 거세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설령 원주민을 쫓아낸다 해도 식량을 확보하고 아내를 얻는 일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기원전 630년경 테라섬 주민들이 북아프리카 키레네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그 후 주민들은 식민지로 떠나는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테라인들은 바투스를 지도자로 삼아 북아프리카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각 가정에서는 아들 한 명씩 식민 이주자로 징발된다. 선발대상은 성인이며 자유시민이어야 한다. 테라를 떠나 이주자들이 다섯 해 동안 정착촌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다시 테라로 돌아와 시민이 될 수 있다. 만약 폴리스가 식민 이주자로 정한 사람이 떠나길 거부한다면 그는 사형에 처하며 재산은 몰수될 것이다. 이 같은 합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자든 테라의 남아있는 자든 상관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의 정부 형태는 세습 군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유의 정치 체제를 가진 폴리스들이 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에서는 여러가지 정부 형태가 혼합돼 있었고 아테네는 솔론의 주도하에 민주정이 기반을 닫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정치제도는 참주제였습니다.
참주제의 등장
참주는 일종의 군사 독재자로 대개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로 알려진 아테네에도 예외 없이 참주가 등장했는데 그의 이름은 페이시스트라토스였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솔론이 시행한 정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지만 여러 계층과 파벌 간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법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솔론은 10년간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도 새로운 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집트와 키프로스 그리고 리디아 등을 여행한 솔론은 여러 현인과 통치자들을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겼습니다. 리디아의왕 크로이소스와 우와 작가인 이솝을 만난 것도이 여행을 통해서였습니다. 솔론과 크로이소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년간의 여행을 마친 솔로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파벌 간의 갈등은 오히려 깊어진 상태였습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평야파 해안파 산지파 등 세계의 당파가 출연해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귀족과 부유층으로 대표되는 평야파는 리쿠르고스가 이끌었고 신흥 상공인 계급으로 구성된 해안판은 아테네로 돌아온 명문 알크메오니다스의 가문의 수장인 메가클래스가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와 빈민 계층이 주축이 된 산지파는 30대 젊은 수장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과 친척 관계여서 어렸을 때부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를 가까이서 지켜본 솔로는 그의 재능과 미모를 지극히 사랑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활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네로 돌아온 솔론은 여러 당파의 수장들을 만나 서로 화해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솔론의 노력은 얼마 후 페이시스트리토스가 꾸민 음모로 인해 물거품이 됩니다.
기원전 561년 어느 날 그는 일부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반대파가 자기를 공격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지어낸 말이었지만 흥분한 지지자들은 그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집회를 열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50명으로 구성된 무장 호위병을 조직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호위병을 동원해 삽시간에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고 반대파였던 메가클래스와 알크메오니다스 가문은 도시 밖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의 참주로 올라서게 됩니다. 솔론은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페이시스 트라토스에게 선동되지 말라고 사람들을 설득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실망한 솔론은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대들이 어리석어 괴로움을 당했으니 하늘과 운명을 원망하지 마라. 폭군에게 성을 내준 것은 그대들이었으니 이제는 자유를 잃은 노예가 될 수밖에 이후 솔론은 정치무대에서는 사라졌지만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참주가 된 페이시스 트라토스도 가끔 솔론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페이시스 트라토스는 솔론의 법을 최대한 보존했고 비록 꼭두각시에 불과하지만 아르콘도 해마다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했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주변에는 많은 적들이 복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메가 클래스와 리쿠르고스가 다시 힘을 모아 페이시스 트라토스를 아테네에서 추방했습니다. 그가 참주가 된지 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메가 클래스와 리쿠르고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했고 메가 클래스는 쫓겨난 참주를 다시 불러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메가 클래스는 페이시스 트라토스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 딸과 결혼한다면 그를 다시 참주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연히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 제안을 거부할 리 없었습니다. 둘은 함께 페이시스 트라토스를 아테네로 돌아오게 할 계획을 짜는데 그 계획이라는게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이들은 키가 크고 용모가 수려한 어떤 여자를 찾아 아테네 여신으로 분장했습니다. 여자에게 가장 그럴듯한 자세를 취하기 해서 수레를 타고 아테네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레 앞에 선발대를 시켜 이렇게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페이시스 트라토스를 환영하시오. 아테네 여신께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분을 소중히 여기셔서 손수 아크로폴리스로 데려오셨습니다. 얼만데 아테네 여신이 페이시스 트라토스와 함께 시내로 입성했다는 소문이 아테네 전역에 퍼졌고 시민들은 예를 다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환영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예로부터 그리스인은 다른 인종에 비해 빈틈이 없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그 그리스인 중에서도 머리가 좋기로 이름난 아테네인을 상대로 그와 같은 계획을 실행했다는 것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그렇게 메가 클래스의 딸과 결혼한 페이시스 트라토스가 재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미 다 큰 아들들이 있었고 알크메우니다의 가문에 부정한 피가 흐른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새 아내와는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치욕감을 느낀 메가클래스와 페이시스 트라토스의 사이가 다시 멀어졌습니다. 페이시스 트라토스는 자신을 겨냥한 음모가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미련 없이 아테네를 떠나 에레트리아로 갔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그는 아들들과 함께 정권을 되찾을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이후 11년간 다시 세력을 규합한 페이시스 트라토스는 군을 이끌고 아테네로 진격했습니다. 그들이 마라톤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아테네로부터 더 많은 동조자들이 합류해 힘을 보탰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그때까지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페이시스 트라토스가 마라톤을 떠나 아테네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군을 움직였습니다. 페이시스 트라토스 군이 아테네군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기습을 감행하자 아테네군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페이시스 트라토스는 패주한 아테네인들이 다시 집결하기 전에 미리 아들들을 보내 아테네인들에게 겁먹지 말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이 이 지시에 따랐기 때문에 페이시스 트라토스는 세 번째로 아테네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그동안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던 알크메우니다 가문은 또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만약 참주를 좋은 참주와 나쁜 참주로 나눌 수 있다면 페이시스 트라토스는 분명 좋은 참주에 속했을 겁니다. 그는 식민지에 있는 은광과 금광을 개발해 막대한 수입을 얻었고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했습니다. 아테네 도기의 인기가 코린토스 도기의 인기를 초월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페이스 스트라토스는 이렇게 축적한 부로 시민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도로와 신전 등 많은 공공토목공사가 진행됐을뿐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체육 행사가 열려서 시민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력 덕분에 아테네는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다른 참주로는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와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가 있었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기원전 540년경에 사모스 섬에 참주가 됐습니다. 사모스 섬은 동부 에게해에 있는 섬으로 수학자로 유명한 피타고라스가 바로 이 섬 출신이었습니다. 해군의 중요성을 알아본 폴리크라테스는 그리스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해군을 육성했습니다. 폴리크라테스슨 이 해군으로 해적 행위를 삼으면서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활동은 불필요한 주목을 받았고 이후에는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그리고 페르시아까지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 안드로스는 고대 그리스 일곱 현인으로 꼽힐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참주로 있는 동안 코린토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잔혹한 인간성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참주 자리를 물려받은 페리안드로스는 처음에는 온화하게 코린토스를 다스렸습니다. 페리안드로스는 밀레토스의 독재자 트라시 블루스에게 사자를 보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트라시 블루스는 조용히 사자를 데리고 작물이 자라는 밭으로 들어가더니 다른 이삭보다 길게 자란 이삭을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코린토스로 돌아온 사자는 페리안드로스에게 트라시 블루스의 이상한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영특했던 페리안드로스는 그의 행동이 방해가 되는 인물을 모조리 죽이라는 뜻임을 이해했습니다. 그 후 페리안드로스는 돌변해서 잔악한 만행과 살육이 난무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고 합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페리안드로스 처럼 찬주제의 장점이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제도였습니다. 참주제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모수당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550년경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메디아와 리디아 그리고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는 막강한 대재국을 건설했습니다. 다행히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랫동안 페르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490년경 페르시아가 마침내 그리스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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