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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마라톤 전투 (아테네 승리와 필리피데스 이야기)

     

     

    아테네 침공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반란을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오니아로 파견된 마르도니우스는 참주제를 없애고 민주제를 실시했습니다. 페르시아에 총성을 바친다면 어느 정도의 자치는 허용하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다리우스왕은 아직 아테네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땅과 물을 바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세력을 도왔으니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배반 행위로 보였을 겁니다.

     

    마르도니우스는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지만 폭풍으로 큰 피해를 입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트라키와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의 속국이 됐습니다. 다리우스는 또다시 원정을 준비했는데 그것과는 별도로 그리스가 싸울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해 보기로 합니다. 얼마 그리스 각지에 도착한 페르시아 사신들이 페르시아 왕에게 흙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큰 두려움을 느낀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이 이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페르시아 사신들을 죽이면서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페르시아에 항복한 곳 중에는 아이기나라는 섬이 있었습니다. 아이기나는 아테네와 앙숙인데다 그리스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해군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기나가 페르시아와 손을 잡는다면 아테네 큰 위협이 될게 분명했습니다. 아테네는 즉시 알기나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 메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아테네 노란한 클레오 메네스가 아이디나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또 다른 왕이었던 데마라토스의 방해 공작으로 클레오메네스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아이가나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데마라토스가 클레오 메네스의 군사활동을 방해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클레오 메네스는 데마라토스와 함께 군을 이끌고 아테네를 공격하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마라토스가 갑자기 스파르타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클레오 메네스도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기나에서도 비슷한 일을 당하자 클레오메네스가 데마라토스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됩니다. 데마라토스는 그의 어머니가 왕과 결혼한지 7개월 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 그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에 돌아온 클레오 메네스는 이 점을 이용해 데마라토스가 정당한 왕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고 결국 그를 탄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클레오메네스가 데마라토스를 상대로 거짓 음모를 꾸민 사실이 발각되자 클레오메네스는 스파르타를 떠나 테살리아로 도주했습니다.

     

    그런데 클레오 메네스가 그 곳에서 군을 모아 스파르타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는 그가 귀국하는 걸 허락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클레오 메네스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전에도 광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지팡이로 내리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보다 못한 클레오 메네스의 측근들은 그를 족쇄에 채워 감금했습니다. 어느 날 클레오 메네스는 간수에게 칼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간수가 거절하자 클레오메네스는 자기가 풀려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협박에 못이긴 간수가 자기 칼을 건네주자 클레오 메네스는 그 칼로 자해를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클레오 메네스는 생전에 데마라토스를 쫓아낸 것 외에도 여러 도시를 공격해 많은 원망을 샀습니다.

     

    특히 아르고스를 공격할 때는 숲에 불을 질러 수많은 병사들을 태워 죽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클레오 메네스가 벌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클레오 메네스의 뒤를 이어 그의 이복 동생이 왕이 올랐는데 그가 바로 레오니다스엮습니다. 한편 아테네에서도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여러 개혁을 이끌었던 클레이스테네스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없는 걸 보면 그 당시에는 이미 사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를 대신해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이들이 아리스티데스와 그보다 6살 어린 테미스토 클레스였습니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반대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리스티데스가 성격이 온화하고 인격이 높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던 반면에 테미스토 클레스는 성급하고 모든 일에 정렬적이었습니다.

     

    청년시절 테미스토 클레스는 공부를 게을리하고 본능에 따라 나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결함을 깨닫고 스스로 품성을 다듬어 이름있는 정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치 성향에서도 반대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리스티데스는 외교를 통해 페르시아와의 갈등을 피하자는 온건파였고 테미스토 클레스는 군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과격파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위기를 타개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이때 밀티아데스라는 한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오래전 히피아스의 명령을 받아 트라키아 지역에 있는 케르소네 소스에 참주가 됐습니다. 그는 참주로 있는 동안 다리수왕의 부하로 스키타의 원정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오니아 반란을 가담했다가 오히려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아 25년 만에 아테네로 귀국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페르시아군의 대사만큼은 아테네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테네로 돌아온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무장 보병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중무장 보병은 다가올 전쟁에서 아테네군의 중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기원전 490년 약 600척의 페르시함대가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이번에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의 사령관은 다티스와 사르데스의 총독 아르타 프레네스의 아들 아르타 프레네스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이제는 노인이 된 히피아스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아테네를 정복하며 그를 통치자로 세울 생각이었습니다. 그리스 입장에서 행운이었던 건 다리우스 왕과 그의 친위 부대가 그리스 원정에 불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사부대라 불리는 1만명의 친이 부대는 최정예부대로 알려졌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사무스 섬을 떠난 페르시아 함대는 헬레스 폰투스 해협을 건너지 않고 에게해 남쪽을 항해했습니다 이점 원정대가 그리스 북쪽을 항해하던 중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 군은 먼저 낙소스 섬을 공격했습니다 이전에 페르시아는 아리스타고라스의 꼬임에 넘어가 낙소스 섬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낙소스 섬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은 도시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낙소스 섬 외에도 몇 개의 섬을 더 점령한 페르시아군은 다음 목표인 에레트리아를 공격했습니다.

     

    이오니아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에레트리아에서 다섯척의 배를 보낸 걸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에리트리아는 격렬하게 정했지만 단 6일만에 도시는 함락되고 주민들은 페르시아로 끌려갔습니다. 에레트리아가 함락됐다는 소식에 아테네인들은 더 이상 여유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테네는 먼저 필리피데스라는 전령을 스파르타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필리피데스는 장거리 주자였는데 그는 놀랍게도 아테네를 떠난지 단 이틀 만에 스파르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거리가 200km여서 하루에 100km 이상을 뛴 셈이었습니다. 아테네로 서둘러 돌아가였다고 추정했을 때 그가 뒤인 총 거리는 400km가 넘었습니다.

     

    필리피데스는 스파르타인들에게 그리스에서 손꼽히는 도시 아테네를 잃는다면 그리스 전력에도 큰 손실일 거라면서 아테네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느리게 행동하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달이 찰 때까지 군을 움직일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 동안은 아테네가 홀로 페르시아를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아테네의 지원군을 보낸 도시는 플라타이아 뿐이었습니다. 플라타야는 총 병력에 해당하는 천명의 중장 보병을 보내왔습니다. 플라타이어는 보유티아에 위치한 도시로 항상 테베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가 나서서 플라타이아를 지켜준 적이 있었는데 플라타이아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지원군을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페르시아가 마라톤에 상륙했습니다. 사실 페르시아는 수니온 곶을 돌아 아테네 가까이에 있는 팔레론에 상륙하는 옵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라톤 평야가 기병 활동에 더 유리하다는 히피아스의 의견에 따라 그곳에 상륙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아테네군은 스트라테고스 불리는 10명의 사령관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밀티아데스도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10명의 스트라테고스는 파가 나뉘어 아테네를 수비해야 한다는 쪽과 마라톤에 나가 싸워야 한다는 일파가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밀티아데스가 그 당시 군사 장관이었던 칼리마코스를 만나 페르시아와 교전을 펼쳐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밀티아데스는 칼리마코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아테네는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습니다. 10명의 스트라테고스는 하루씩 교대로 군을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조금 더 경험이 많은 밀티아데스에게 그들의 지휘권을 양도했습니다. 이로써 밀티아데스가 아테네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됐습니다.

     

    마라톤 전투

    얼마 후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양군은 마라톤에서 서로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 페르시아의 전력은 대략 2만에서 3만 정도였을 거로 추정됩니다. 그에 비해 아테네 군의 병력은 1000명의 플라타이어 병사를 합쳐 대략 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양군은 서로 상반된 포진을 취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이 중앙을 두텁게 한 반면에 아테네군은 중앙을 얇게 했습니다. 그 대신 대부분의 병력을 양 날개에 집중시켰습니다.

     

    전투 준비가 끝나자 아테네는 스파르타군이 도착하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적진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그때까지 그리스인은 페르시아군의 모습만 봐도 공포에 질렸었기 때문에 그리스군이 먼저 공격을 감행한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곧이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중앙부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군을 압도했지만이 상황은 밀키아데스가 미리 계획한 대로였습니다. 양 날개에서는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을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측면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은 다시 방향을 돌려 페르시아의 중앙부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가 나테네가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전사자 수가 6400명이었던 것에 비해 아테네의 전사자는 단지 192명이었습니다. 아테네 쪽 전사자 중에는 오른쪽 날개 지위를 맡았던 칼리마코스가 있었습니다. 아테네군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해변의 정박해 있던 페르시아 선박을 공격해 적선 일곱 척을 나포했다고 합니다. 전투가 끝나자 마라톤에서 뛰어온 필리피데스 아테네 승전 소식을 알리고는 곧바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마라톤 경기에 유래가 됐다는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후대 지어낸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라톤 전투의 1차 사료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필리피데스를 언급할 때 그가 스파르타의 전령으로 보내졌다는 기록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필리피데스가 뛰어왔다는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건 고대 로마 작가의 루시안의 작품을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루시아는 마라톤 전투가 있고 600년 후에 태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전한 이야기가 실제 역사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한편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아직 아테네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배를 타고 수니온 곶을 돌아 아테네로 향했습니다 만약 아테네 군보다 먼저 아테네 도착할 수 있다면 어쩌면 손쉽게 아테네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군은 빠른 걸음으로 진군해 페르시아군에 앞서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확인한 페르시아군은 더 이상 싸우는 걸 포기하고 아시아로 떠났습니다. 얼마 후 스파르타 병사 2000명이 뒤늦게 아테네 도착했습니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의 시체를 확인한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인의 용기와 무공을 칭찬하고는 다시 스파르타로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