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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과 그리스 도시들의 대처

     

     

    아테네 테미스토 클레스

    아테네에서는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전쟁 영웅에 걸맞지 않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마라톤 전투가 끝난 직후 밀티아데스는 그의 명성을 이용해 70척의 배와 군자금을 얻어냈습니다. 그는 해군을 이끌고에게 에게해에 있는 타로스 섬을 공격했는데 그가 이 섬을 공격한 이유는 단지 사적인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파로스인들이 성벽 안에 틀어박혀 방어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밀티아데스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아테네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파로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밀티아데스를 향한 민심도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특히 아테네 정치인 크산티포스는 밀티아데스가 아테네시민을 기만했다면서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재판에 나온 밀키아데스는 병이 악화돼 변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밀티아데스는 파로스 원정 때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었는데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허벅지가 썩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테네 시민들은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 밀테아데스에게 사형 대신 50 탈란톤의 벌금형을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재판이 끝나고 얼마 안 돼 밀티아데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라톤 전투가 있고 불과 1년 만에 맞이한 초라한 죽음이었습니다. 밀티아데스의 공백을 매운 건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리스티데스였습니다.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이 둘은 성향이나 정책면에서 반대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둘 다 스테실라오스라는 미소년을 사랑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계속됐습니다.

     

    아리스티데스가 청렴하고 공명 정대한 정의의 사나이라는 명성을 가진 반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권모술수에 능했고 시민들에게는 조금 더 친밀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테미스토클레스는 인기를 얻기 위해 연극을 후원하고 모든 시민들의 이름을 다 외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원전 483년 아테네가 차지한 라우리움 광산에서 새로운 광맥이 발견됐습니다. 아테네에서는 여기서 발생하는 추가 수입을 어떻게 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돈으로 해군을 강화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아테네는 그때까지도 해군력이 변변찮아서 앙숙이었던 아이기나와의 해상권 다툼에서도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이기나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광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200척의 함선을 건조했습니다.

     

    이때 50노선이 주축이었던 아테네 해군은 더 강력한 3단 노선으로 업그레이드 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테네인들은 아직 몰랐겠지만 해군 강화는 다가올 전쟁에 대비한 시기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군보다는 육군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리스티데스는이 조치의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아리스티예스의 견제가 성가졌는지 테미스토 클래스는 얼마 후 도편 추방제를 이용해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테미스토클래스가 아테네의 실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비슷한시기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는 그리스의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각지에 사신을 보내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3년간 페르시아 전체가 전쟁 준비로 들썩였을 정도로 페르시아는 총력을 다해 이번 원정에 대비했습니다. 그 만큼 그리스에 대한 다리우스의 적개심이 대단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4년째 되던 해에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다리우스는 그리스 원정을 잠시 미루고 이집트로 출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후계자를 정하기로 합니다.

     

    다리우스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키루스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크세르크세스가 우여곡절 끝에 후계자로 지명됐습니다. 이때 클레오 메네스의 개략으로 억울하게 스파르타에서 왕위를 빼앗겼던 데마라토스가 크세르크세스가 후계자가 되는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데마라토스는 그 이후에도 크세르크세스의 측근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집트로 출정 준비가 한창이던 기원전 486년 다리우스가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크세르 크세스

    죽은 다리우스의 뒤를 이어 크세르크세스가 새롭게 왕위에 올랐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가 죽은 이듬해 군을 파견해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와 전쟁을 벌이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말로 전사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름과는 다르게 그는 우유부단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 원정을 망설이자 곁에 있던 마르도니우스가 강하게 그리스를 공격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를 정복하며 자신이 그리스의 총독이 될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마르도니우스의 설득에 넘어간 크세르크세스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그리스를 토벌하겠다는 계획을 공포했습니다. 문제는 크세르크세스의 작은 아버지이자 죽은 다리우스 왕의 형제인 아르타 바노스가 원정의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헬레스 폰투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진격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며 무용이 뛰어난 그리스를 상대로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면서 원적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르타바노스가 말을 마치자 크세르크세스는 그가 작은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벌을 내렸을 거라면서 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회의를 끝내고 혼자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아르타 바노스의 말이 옳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날 밤 크세르크세스는 꿈을 꿨는데 어떤 잘생긴 남자 한 명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대는 지금에 와서야 그리스 원정을 중재할 셈이요.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않겠소. 그리스 원정을 계속 밀어붙이시오. 하지만 잠을 깬 크세르크세스는 꿈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신하들을 불러 모으더니 어제 자신이 한 말은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며 아르타 바노스의 조언에 따라 그리스 원정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들은 신하들은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꿈을 꿨는데 전날 밤에 만났던 남자가 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리우스의 아들이여 그대는 내 말을 무시하고 원정을 중지해버렸소. 만약 즉시 원정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대는 왕위에 옳은 것만큼이나 빠르게 몰락하게 될 것이요. 이틀 연속으로 같은 내용의 꿈을 꾸자 두려움을 느낀 크세르크세스는 아르타 바노스에게 꿈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그가 왕의 옷을 입고 자신의 침대에 두어 잠을 자 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르타 바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그러한 꿈은 신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전하보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제가 말씀드리자면 꿈이란 낮에 생각했던 것이 잠을 자는 가운데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확신이 가지 않는다면 분부대로 왕의 침소에서 잠을 자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아르타 바노스는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왕의 침소에서 잠들었습니다. 꿈 속에서 아르타바노스는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크세르크세스가 꿈에서 봤던 바로 그 환영이었습니다.

     

    환영은 아르타 바노스에게 말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를 말려 그리스 원정을 중단시키려는 자가 그대인가 운명의 흐름을 바꾸려고 한다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크세르 크세스가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이미 그에게 말해뒀다. 말을 마친 남자가 뻘겋게 달군 쇠로 그의 눈을 찌르려고 하자 깜짝 놀란 아르타 바노스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즉시 크세르 크세스에게 달려가 이 전쟁은 신의 뜻이니 계획대로 원정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 원정이 확정됐습니다.

     

    페르시아에서 그리스 원정이 결정되자 데마라 토스는 스파르타에 몰래 서판을 보내 페르시아가 침략할 거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데마라 토스가 스파르타를 원망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페르시아가 또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은 코린토스에 모여 어떻게 할지를 논의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서로와의 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했는데 당시 가장 사이가 나빴던 도시는 아테네와 아이기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또 아르고스와 크레타 그리고 시라코사 등의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아르고스와 크레타는 그리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특히 아르고스는 스파르타군에 의해 병사 6000명이 살해되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르고스는 스파르타라면 이를 갈았는데 스파르타에서 도움을 요청하자 스파르타를 따르느니 차라리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크세르 크세스를 설득해 그리스를 공격하게 한 것이 바로 아르고스였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스파르타에 대한 아르고스의 적개심을 대단했습니다.

     

    이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도시는 시라쿠사 뿐이었습니다. 시라코사는 시칠리아섬에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식민지였지만 당시에는 그리스 도시들 중 가장 강력했다고 전해집니다. 시라쿠사의 참주 겔론을 만한 그리스 사절단은 그리스가 무너지면 시라코사도 안전하지 않을 거라면서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겔론은 지난날 그가 카르타고와 싸울 때 그리스인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서 지원군을 보내길 주저했습니다. 결론은 지원군을 보내는 조건으로 그리스 군의 통솔권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그리스인들이 그런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습니다. 결국 시라쿠사와의 협상마저 실패한 상황에서 그리스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페르시아를 막아내야 했습니다. 한편 페르시아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병사들이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군을 형성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육해군 총 병력은 무려 231만 7610명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비전투 인원까지 모두 합친다면 총 병력은 528만 3220명으로 불어납니다. 그런데 너무나 터무니없는 숫자여서 오늘날에는 약 20만에서 30만 정도가 동원 데스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도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에 더해 127척의 대함대가 원정에 참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80년 약 5년간의 전쟁 준비를 마친 크세르크세스가 직접 군을 이끌고 헬레스 폰토스의 해협의 설치된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때 전 군이 다리를 건너는데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