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붕괴
기원전 1200년경 그리스에서는 미케네인들이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습니다. 미케네는 크레타를 굴복시켰을뿐 아니라 트로이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뒀습니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에게해 패권을 사악한 이들에게 밝은 앞날이 보장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게 끝나버렸습니다. 알 수 없는 재앙이 닥쳐 그때까지 멀쩡했던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문명들이 한순간에 붕괴한 것이었습니다.
청동기시대 붕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강성했던 히타이트 왕국과 레반트의 많은 도시들이 사라졌습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정도가 간신히 멸망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력이 쇠퇴했습니다. 특히 이집트 이때부터 동네북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13세기부터 시작된 혼란으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광범위한 파괴와 방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그리스의 인구가 급감했고 죽음을 피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산지로 대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아테네를 제외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이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이로써 미케네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이런 갑작스런 붕괴가 있었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아직까지도 역사상 가장 큰 미스테리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후대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도리아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북쪽에서 내려와 파괴를 자행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이 주장은 정설로 받아들여졌지만 사실 도리아인이 침략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 대신 도시 국가들간의 전쟁이 더 큰 원인이었을 거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도 트로이와의 전쟁 이후에 그리스 여러 지역에서 내란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원인은 바로 바다 민족입니다. 실제로 지중해 여러 도시들이 바다에선 정체불명의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성할뿐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한 민족이 아니라 여러 민족의 연맹이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뭉뚱그려 바다 민족이라 부릅니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2세때 셰르덴이라 불리는 이들이 바다로부터 침략해 왔다고 합니다. 아무도 셰르덴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랐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이들이 얼마나 강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람세스 2세의 통치하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이집트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람세스 2세는 셰르단을 가까스로 격퇴했고 그중 많은 수를 생포했다고 합니다.
이집트 군의 편입된 이들은 이후 히타이틀을 상대로 한 카데시 전투에도 참전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바다민족의 침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세클래슈와 덴옌 그리고 루카와 같은 바다민족들이 침략을 이어갔고 그 결과 이집트는 가나안을 포함한 많은 영토를 이들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민족의 약탈 행위만으로는 어떻게 여러 문명이 한꺼번에 붕괴했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진이나 가문 같은 자연재해가 더 큰 원인이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 었던지간에 이 사건을 겪은 그리스와 아시아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나긴 암흑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이 시대의 문자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이후 300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문명이 이전보다 훨씬 쇠퇴했다는 겁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예술품이나 건축물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파괴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암흑시대 동안 아무런 발전도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먼저 서아시아로부터 철기가 그리스에 전파됐습니다. 철기로 더 강력한 무기가 제조됐을뿐만 아니라 농기구의 성능 또한 크게 향상됐습니다.
농기구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인구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리스 본토 인구가 증가하자 이들은 그리스를 떠나 지중해 여러 지역의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특히 이오니아에 집중적으로 많은 도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온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알파벳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의 알파벳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 알파벳은 이전 문자들보다 훨씬 쉽고 효율적인 문자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알파벳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이런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는 교육과 학문 그리고 정치와 철학 등 많은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헤로도토스
알파벳은 또 역사적 사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데도 용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또한 알파벳의 덕을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시간상 한참 후대인 기원전 400년경의 활동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언급할 많은 이야기들이 그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4년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리스인들에게 역사나 신화와 인간사가 뒤섞인 이야기였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어떻게든 그 속에서 실제 역사를 유추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일반적인 역사 기록과는 다르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시의 형식을 띠고 있어서 대중들의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만을 전하려고 했던 이가 바로 헤로도토스였습니다.
헤로도토스는 남들이 전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걸 거부하면서 본인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최대한 실제 있었던 사건들만을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객관적인 시점에서 역사를 전달하려는 노력 덕분에 그는 오늘날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듣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록이 과장되거나 잘못된 사실을 전해 거짓의 아버지라는 오명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최근까지 거짓이라 여겨졌던 그의 많은 기록들이 이후에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그리스와 이집트 그리고 페르시아 같은 문명 국가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흑해 등 여러 오지를 여행하면서 그가 보고들은 것을 그의 저서인 히스토리아이에 기록했습니다. 그 중 그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이집트였습니다. 헤로도토스가 이집트의 어떤 신전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 사제들로부터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트로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파리스가 스파르타에서 헬렌을 납치한 건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헬렌이 특별히 미인이라서 그런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 그리스인들이 아시아에서 여자들을 납치한 적이 있었는데 파리스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헬렌을 납치한 것이었습니다. 파리스는 납치한 헬렌과 함께 트로이로 향했지만 배가 바람에 떠내려가 의도치 않게 이집트의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파리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노예들이 그곳에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토니스를 찾아가 파리스가 헬렌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니스는 파리스를 이집트에서 추방했고 헬렌은 홀로 이집트에 머물게 됩니다. 한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는 아내를 돌려받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했습니다. 트로인들은 사실대로 헬렌이 이집트에 있다고 알려줬지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메넬라우스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트로이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나서야 헬렌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이집트에 도착한 메넬라우스는 헬렌과 제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메넬라우스는 하루 빨리 배를 뛰어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악천후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지역에서는 어린아이 두 명을 잡아다가 희생물로 바쳤습니다. 이 행동은 이집트 주민들의 분노를 샀고 메넬라우스는 쫓기듯이 이집트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호메르스의 일리아스와는 꽤 큰 차이를 보입니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에 사견을 덧붙여서 호메르스 보다는 사제들의 이야기가 훨씬 더 믿을만하다고 말했습니다. 단지 여자 한 명을 빼앗으려고 프리아모스가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집트 사제들은 또 그리스의 12신들이 사실은 이집트에서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12신의 호칭을 정한 것도 이집트인이 처음이었고 그리스인이 이집트인으로부터 그것을 배웠다고 한다.
또 신들의 제단이나 신상이나 신전을 세우는 것도 돌의 모양을 조각하는 것도 이집트인이 창시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사제들은 대부분 신뢰를 제시해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해 보였다. 디오니소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신의 이름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들어갔다. 그리스의 신들이 그리스 이외의 나라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내가 직접 조사해서 확인한 것이다.
이집트인이 이름을 모른다고 말하는 신들은 포세이돈을 제외하고는 펠라스고이인이 명명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인이 포세이돈을 안 것은 리비아인으로부터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에 머물면서 이 날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는데 많은 면에서 이들이 다른 민족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오줌을 눌 때 여자는 서서 누고 남자는 쪼그려 앉아서 놓았다고 하고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대신에 남자들은 집을 지켰습니다.
또 이집트인들은 유독 청결을 중요시해서 매일 아침과 저녁 각각 두 번씩 냉수욕을 했다고 합니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인이 죽은 사람의 몸으로 미라를 만드는 풍습도 꽤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사람이 죽으면 가족은 그의 시체를 미라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러면이 장인은 실물과 비슷한 미라의 견본을 가족에게 보여주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했습니다. 당연히 세공이 더 정교할수록 가격도 올라갔습니다.
가족이 미라를 선택하면 장인은 미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먼저 구분 연장으로 콧구멍에서 뇌수를 꺼내는데 이때 약품도 주입한다. 그 외 티오피아 돌로 옆구리를 절개하고 내장을 모두 꺼내고 꺼낸 내장을 깨끗이 씻어 다시 갈아서 으깬 향료로 깨끗이 한다. 이어 맷돌로 간 순수한 몰약과 육계 그리고 유황 이외의 향료를 복강에 쟁이고 봉합한다.
그 후 이것을 천연소대에 담가 70일간 놓아둔다 70일이 지나면 유체를 씻어 고급 아마포로 잘라 만든 붕대로 전신을 감고 그 위에 고무를 바른다 일이 끝나면 가족이 미라를 받아 사람 모양의 나무 상자 안에 넣는다.
이집트 남쪽으로는 에티오피아와 쿠시 왕국이 있었는데 헤로도토스는 이곳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집트와 접해 있던 이 지역은 꽤 발전된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 동안은 이집트를 지배했을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해로도토스는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 최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방문하는 것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페르시아가 외국의 풍습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다양한 풍습을 도입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디아로부터는 의상을 그리고 이집트로부터는 가슴 갑옷을 도입하는데 그리스로 부터는 특이하게도 남자 간의 동성애를 배워왔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인들은 또 술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반면에 사람들 앞에서 토하거나 오줌을 누는 행위를 경멸했습니다.
이 밖에 페르시아에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행동으로는 돈을 빌리는 것과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돈 꾸는 걸 싫어한 이유는 아무래도 돈을 빌리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자면 기원전 800년경 그리스에서는 수백년간 이어졌던 암흑시대가 끝나고 드디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이 시대의 주인공은 스파르타와 아테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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