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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플라타이아 전투와 페르시아의 몰락

     

     

    테미스토 클레스

    기원전 480년 그리세군이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패배를 한 크세르크세스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tn적인 우세를 앞세워 쉽게 그리스를 제압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편 승리를 맛본 테미스토 클레스는 곧장 헬레스 폰토스에 있는 다리를 파괴해 페르시아군의 퇴로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에우리비아데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만약 적의 퇴로를 끊는다면 공지에 몰린 페르시아군은 더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적이 본국으로 도망치게 내버려 두자고 말했습니다.

     

    계획이 틀어지자 테미스토크레스는 페르시아 쪽에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지략과 용맹을 모두 갖춘 테미스토클레스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그는 전하께 도움을 드리고자 귀국의 함대를 추격해 헬레스 폰터스의 선교를 파괴하자는 그리스 군을 말렸습니다. 이제 안심하시고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런 말을 전한 데에는 페르시아의 잘 보여서이 속을 챙기려 했다는 의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크세르크세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만약 해상권을 장악한 그리스 상대가 퇴로를 차단한다면 제 아무리 크세르크세스라 해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크세레크세스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때 아르테미시아가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전하깨서는 본국으로 철수하시고 마르도니오스에게 그가 바라는 만큼의 병력을 주어 이곳에 남기십시오. 만약 마르도니우스가 그리스를 정복한다면 그 또한 전하의 공적입니다. 만약 마르도니우스가 실패한다면 전하께서 안전하시나 그리스는 자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고된 시련을 겪어야 할 겁니다.

     

    피세르크세스 안 그래도 기세가 꺾인 상태였기 때문에 아르테미시아의 제안을 따르기로 합니다. 그는 마르도니오스에게 불사부대를 포함한 30만 병력을 맡기면서 본인은 헬레스 폰토스를 건너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65년 쿠데타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이후 15년간 페르시아를 통치했습니다. 참고로 크세르크세스는 성경에도 등장한다고 알려졌습니다. 성경에는 아하소에르 왕의 왕후가 된 유대인 에스더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는데 이 아하수에로 왕이 바로 크세르크세스라는 겁니다. 하지만 연대기로 봤을 때 아하수에로가 크세르크세스가 아닌 메디아의 왕이자 키루스의 할아버지인 아스티아게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시 그리스로 돌아가면 왕을 떠나보낸 마르도니오스와 30만 페르시아군은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북쪽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여유가 생긴 그리스군은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임무를 뽑았는데 테미스토클레스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테미스토 클레스의 명성은 그리스 전역에 퍼졌고 스파르타는 그를 초대 올리브 관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테미스토 클레스가 아테네로 귀국할 때에는 스파르타 정예병 300명이 그를 배웅했습니다. 그때까지 스파르타인의 배웅을 받은 사람은 세계에서 테미스토 클레스를 단 한 명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공로와는 별개로 테미스토 클레스는 함대를 이끌고 사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러 섬의 사자를 보내 금품을 보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협박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금품을 뜯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테미스토 클레스는 위기를 틈타 사익까지 챙길 줄 아는 영악한 인물이었습니다. 얼마 후 아테네에 사절이 한 명이 도착했는데 그는 북쪽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였습니다. 마르도니오스가 아테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테네에서도 평판이 높았던 그를 사절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왕께서는 아테네인이 저지른 과실을 모두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아테네인에게 국토를 반환하고 그에 덧붙여 그들이 원하는 지역을 선정하여 그들을 독립국으로 대우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테네가 평화의 협정을 맺는다면 페르시아가 불태워버린 신전을 모두 재건하라고도 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에 대체 무슨 까닭으로 대왕께 싸움을 거는가입니다. 설사 그대들이 우리 군대를 물리친다 해도 지금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새로운 군대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쪽에서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지금 그대들이 화평을 구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귀국이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는 걸 두려워한 스파르타에서도 사저를 보내왔었는데 아테네는 일부러 같은 시간에 스파르타의 사절과 알렉산드로스를 함께 접견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듣고 다급해진 스파르타의 사절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테네 시민들을 부양하겠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알렉산드로서의 설득에 넘어가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자 아테네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황금을 가져와도 또한 아무리 아름답고 비옥한 땅을 준다 해도 우리가 공동의 적인 페르시아와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요. 이것이 우리의 결심이니 서둘러 군대를 보내주길 바라오 곧이어 아테네가 화친을 거절했다는 소식에 테살리아에 있는 마르도니오스에게도 들려왔습니다.

     

     

    마르도니오스 페르시아 최후

    마르도니오스가 즉시 군을 일으켜 남쪽으로 진격하려 하자 테베인들이 찾아와 공격을 멈추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인들을 돈으로 매수해 그들이 알아서 분열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목말랐던 마르도니오스는 막무가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도니오스가 아테네 도착했을 무렵에는 아테네인들은 모습을 감춘 뒤였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살라미스 섬이나 함선으로 피신해 있던 것이었습니다. 마르도니우스는 다시 사신을 보내 아테네 항복을 촉구했습니다. 그러자 리키데스라는 아테네인이 나서서 마르도니오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분노한 아테네 시민들은 돌을 던져서 리키데스를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전해들은 아테네인들의 아내들은 리퀴데스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아내와 자식들도 돌로 쳐 죽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페르시아에 대한 아테네의 적개심이 대단했던 것이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에 머물면서 하루빨리 스파르타가 원군을 보내주길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이전부터 우유부단하고 꾸물거리기로 유명했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종교 행사 기간이어서 스파르타는 군을 보내길 주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코린토스 지역에 짓고 있던 방어벽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급해진 쪽은 아테네였습니다. 아테는 스파르타의 사조를 보내 하루 빨리 군을 보내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감독관들은 답변을 다음 날로 연기했는데 다음 날이 되자 다시 그 다음날로 연기했습니다. 감독관들은 이런 식으로 무려 열흘 동안이나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당연히 아테네 사절단은 약이 올라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독관을 찾아가 더 이상 지원군을 기다릴 수 없으니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감독관들로부터 예상 외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미 스파르타군이 북쪽으로 진군 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감독관들은 스파르타 병사 5000명과 함께 각각의 병사에게 노예 7명씩을 붙인 총 4만의 부대를 출정시켰는데 사절단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타군의 총 지위는 죽은 레오니데스의 조카 타우사니아스 맡았습니다. 곧이어 아리스티데스가 지휘하는 8천명의 아테네군이 스파르타군과 합류했습니다. 이로써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동맹 관계는 가까스로 유지됐습니다. 스파르타군이 진군중이라는 소식에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네 시가지를 모두 불태우고는 북쪽 테배로 후퇴했습니다. 아테네 주변 지역이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테베인들은 마르도니오스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들이 서로 섞여 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페르시아인이 옆에 앉은 그리스인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 있는 페르시아인들 중 겨우 몇몇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요. 페르시아인들 중에서도 내 말이 진실임을 아는 자가 적지 않소 하지만 우리는 모두 운명을 벗어날 수 없어이 세상에서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만큼이나 비참한 것이 없소. 양군은 결전을 벌이기에 앞서 에리트리아라는 곳에서 탐색전을 가졌습니다. 이때 마르도니오스는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기병대를 보내 그리스군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반대로 기병대가 없던 그리스군은 기병대의 돌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마시스티오스가 이끌었는데 그는 페르시아군에서 마레도니오스 다음의 인물이었습니다. 기병대는 그리스군을 향해 돌격을 되풀이했고 그때마다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계속된 돌격으로 그리스군이 수세에 몰렸을 때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선두에서 공격하던 마시스티오스가 낙마한 것이었습니다. 기회를 포착한 아테네 군은 곧바로 달려들어 그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마시스티오스는 비늘모양의 황금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주홍색 웃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찌를 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병사 한 명이 투구에 난 구멍을 찔러 가까스로크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마시스티우스의 죽음은 페르시아군의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기병대는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하고 본진으로 후퇴했습니다.

     

     

    플라타이아 전투

    얼마 후 양국은 플라타이아에서 대치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맞는다면 이때 페르시아의 병력은 30만이었고 그리스 연합군은 10만 8천명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데다 기병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군의 무장상태는 페르시아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군과 그리스군의 전투에 앞서 점을 봤는데 양쪽 모두 먼저 공격하는 쪽이 불리하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양국은 아소포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체하면서 열흘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이 가만히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키타이론에 있는 진입로를 통해 새로운 그리스군이 매일 합류하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진입로에 기병 부대를 파견해 새로운 부대의 유입을 막는 한편 마침 그곳을 통과하던 식량 수송대를 가로챘습니다. 페르시아군은 계속해서 적을 도발했지만 그리스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먼저 움직인 쪽은 페르시아였습니다. 마르도니우스는 기병대를 보내 그리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병대는 활을 쏘고 창을 던지면서 공격했지만 그리스군은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기병대의 가장 큰 수학은 그리스군의 식수 역할을 하던 가르가피아 샘을 파괴한 것이었습니다 아소포스 강이 있었지만 적이 화살을 쏴 강에 접근하는 걸 막았기 때문에 그리스군은 모두 이 가르가피아 샘을 식수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샘이 파괴되자 더 이상 식수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진입로가 차단됐기 때문에 식량을 조달하는데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스 군은 회의 끝에 강 사이에 있는 섬으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그곳으로 옮기며 식수 문제가 해결되는 데다 기병대 공격도 어느 정도 누그러질 거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에 들키지 않기 위해 한밤중에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그리스 군이 혼란에 빠져 엉뚱한 곳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반면 스파르타군과 아테네군은 각자 사정이 생겨서 이동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타 진영에서는 아몸파레토스가 적에게 등을 보일 수 없다면서 이동하길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파우사니아스가 언덕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걸 본 아테네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스파르타군과는 다르게 평야로 내려와서 진군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움직일 수 없다고 버티던 아몸 파레토스도 그제야 군을 움직여 본대를 뒤따라갔습니다. 이미 날이 밝아 있어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이 이동하는 것을 훤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레도니오스는 그리스군이 퇴각하는 거라 생각해 총 공격을 명했습니다. 스파르타군은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받자 아테네군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 쪽도 공격을 받고 있어서 지원군을 보내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본진에 맞서 홀로 싸워야 했습니다. 페르시아는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면서 스파르타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 와중에 파우사니아스는 점을 보면서 공격할 때를 노리고 있었는데 원하는 전개가 나오지 않아서 화살만 맞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좋은 전개가 나오자 스파르타는 그제야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스파르타는 무서운 위력을 보이면서 적을 밀어붙였습니다.

     

    페르시아군도 용감히 싸웠지만 훈련이 미숙해 전술에는 매우 약했습니다. 게다가 병사 대부분이 경무장을 하고 있어서 실전에서는 스파르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도니오스는 백마를 타고 다니면서 싸움을 독려했지만 그 또한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파우사니아스는 플라이타이아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했습니다. 사실 전략적으로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순전히 힘으로 밀어붙여서 얻은 승리였습니다. 반면에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참담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패주한 페르시아군 대부분은 목조 요새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곧이어 그리스군이 공격해왔는데 전투 초반에는 방어하는 페르시아 쪽이 훨씬 유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테네군이 맹렬히 공격해 성벽을 파괴하자 전세는 빠르게 그리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수십만의 페르시아군은 좁은 지역에 갇혀 도망치지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군은 그런 페르시아군을 마음대로 학살했습니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를 정복하려던 페르시아의 야욕이 완전히 꺾이게 됩니다. 30만 병력 중에서 도망친 4만명은 제외한 거의 전원이 전사하는 괴멸적 피해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