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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두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파우사니아스의 마지막

     

     

    테미스토클레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최후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어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파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페르시아군을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페르시아는 30만 병력 중에서 먼저 도망친 4만을 제외한 거의 전원이 전사는 괴멸적인 피해를 받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마르도니오스가 남긴 식기와 가구를 보자 마르도니오스에게 올렸던 것과 똑같은 요리를 내오라고 했습니다. 곧이어 요리사가 페르시아 시계에 담긴 산해진미를 대령가자 파우사니아스는 그 화려함에 경악했습니다. 장난삼아 그 옆 테이블에 스파르타 음식을 나란히 올려놨었는데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웃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계기가 돼서였는지 카오사니아스는 이때부터 수상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플라타이에서 뒷정리를 끝낸 그리스군은 곧바로 테베로 진격했습니다. 테베는 그리스를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에 섰던 데다 전투에서도 가장 맹렬하게 싸웠기 때문에 그리스 입장에서는 이를 갈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스군 이 테베를 포위하면서 압박해오자 테베는 항복하면서 페르시아의 협조했던 인물들은 모두 그리스 군에 양도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기 바다에서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티키데스와 아테네 크산티포스가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이오니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미켈레와 사모스 섬이었습니다.

     

    사모스 섬은 1차 페르시아 전쟁 때부터 페르시아 해군이 기지로 삼았던 곳이어서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에 플라타이아에서 그리스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사기가 오른 그리스군이 다시 한번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이. 이 전투의 승리로 그때까지 페르시아의 복종하던 수 많은 이오니아의 성과 도시들이 그리스 쪽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후 레오티키데스가 지휘하는 펠로폰 네소스 함대는 그때까지의 성과에 만족하고 그리스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크산티포스가 이끄는 아테네 부대는 독자적으로 북상해 헬레스 폰터스에 있는 세스토스에 도착했습니다.

     

    유럽 쪽에 있는 도시로 반대편에는 아비도스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그곳에 페르시아군이 설치한 다리를 파괴하는 것이었지만 도착해보니 다리는 이미 파괴된 뒤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군은 계속해서 세스토스성을 포위 공격했고 결국 심령이 떨어진 세스토스는 아테네군에 성문을 열어줬습니다. 이로써 이오니아에 이어 헬레스 폰투스까지 그리스의 세력권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헤로도토스의 기록도 끝을 맺게 됩니다. 비록 기록이 다소 과장됐다는 평이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방대한 양의 기록을 후대에 전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고대에 대해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이 미스테리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오늘날 그는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역사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투키디데스입니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의 전쟁까지의 역사를 전했다며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에 벌어진 패권 다툼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아테네 출신의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직접 군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한 투키디데스는 20년간 아테네 밖으로 추방됐고 이 기간에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게 됩니다. 투키디데스는 역사를 기술할 때 철저한 검토를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헤로도토스 이상으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역사 기술 방식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우연히 주어들은 대로 또는 내 의견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든 남에게들은 것이든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다 해도 사실을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건의 증인이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478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와 파우사니아스는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테미스토클레스의 인기는 대단해서 올림픽 경기장에 그가 나타나자 관객들은 경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환호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인기만큼이나 능력 또한 뛰어났습니다.

     

    그가 아테네 해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출항 바로 전날까지 일을 쌓아두다가 산더미같이 밀린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겠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세리포스라는 곳에서 온 어떤 남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명성은 당신 혼자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아테네 덕분입니다. 그러자 테미스토 클레스는 이렇게 받아쳤습니다. 그대 말이 맞습니다. 내가 만일 세리포스에서 태어났다면 큰 인물이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아테네 사람이었다 해도 나처럼 큰 인물이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테미스토 클레스는 유독 명예욕이 강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업적을 과시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겸손을 모르는 성격 때문에 그를 증오하는 적들도  늘어났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파괴된 아테네를 재건하고 성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사절단을 보내 성벽을 쌓는 걸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스파르타 사절단은 페르시아가 또 다시 아테네를 침공하면 아테네 성벽이 그들의 요새 역할을 할 거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속셈은 아테네가 강해지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아테네가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식이 달갑지 않았던 겁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달래기 위해 테미스토 클레스가 포함된 사절단을 보내기로 합니다. 떠나기에 앞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자기는 먼저 스파르타에 가있을 테니 나머지 사절단은 성벽이 어느 정도 완성될 때까지 최대한 늦게 보내라고 일러뒀습니다.

     

    스파르타에 도착한 테미스토클레스는 관청에 출두하지 않고 나머지 동료 사절단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스파르타에서도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스파르타인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아테네인들은 여자아이 할 거 없이 모든 시민들이 전력을 다해 성벽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이 완성됐다는 소식이 스파르타에도 전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스파르타인들은 얌전히 테미스토 클레스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미리 감독관을 매수한 데다 아테네인들이 스파르타에서 온 사절단을 인질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네로 돌아온 테미스토클레스는 성벽을 재건하는데 멈추지 않고 아테네와 외항에 있는 피레우스를 성벽으로 연결했습니다. 이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였습니다. 만약 아테네가 포위된다면 식량 공급이 끊겨서 장기간 농성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와 피레우스가 일체화됨으로써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도시가 포위된다 해도 바다를 통해서 식량과 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포위가 아무리 길어진다 해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해군만 건재하다면 아테네 또한 건재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정책은 또 권력이 귀족으로부터 평민에게로 이동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바다에 접하게 되면서 배를 타고 항해하는 평민이 자연스럽게 부와 실권을 쥐게 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아테네는 해상 강국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스파르타의 영웅 파우사니아스도 활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78년 파우사니아스는 그리스 연합함대로 키프로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비잔티온으로 향했습니다. 이것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비잔티온까지 점령하고 페르시아가 육로로 침략할 만한 경로를 모두 차단하게 됩니다. 파우사니아스는 이때부터 참주처럼 행세하며 그리스와 이오이아인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 파우사니아스의 고압적인 태도를 참지 못한 이들은 스파르타이크를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파우사니아스가 페르시아에 협력한다는 수많은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타우사니아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찬성하신다면 저는 폐하의 사위가 돼 스파르타와 그리스 전체가 폐하께 복종하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계획을 세운다며 제게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타우사니아스는 비잔티온에 머물면서 외출할 때는 페르시아풍의 옷을 입었고 식사도 페르시아식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골적인 행동이 사람들의 의심을 샀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스파르타로 소환된 파우사니아스는 재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한번 의심을 산 파우사니아스는 다시는 요직을 맞지 못했고 그는 결국 스파르타를 떠나 트루아스 지방에 콜로나이의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파우사니아스가 계속해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려오자 스파르타 감독관들은 다시 한번 그를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확증을 갖고 있었던 감독관들은 파우사니아스를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파우사니아스는 도망쳐 바로 근처에 있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파우사니아스를 억지로 끌어내는 대신 신전의 입구를 봉쇄 그가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굶어죽기 바로 직전에야 신전 밖으로 끌려 나왔는데 끌려 나오자마자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은 역시 아테네였습니다. 이오니아 도시들과 에계해 섬들이 주축이 된 동맹국 대부분이 카오사니아스의 기행에 질려 있었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휘말리기 싫었던 스파르타도 더 이상 사령관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델로스 동맹

    자연스럽게 동맹의 통수권은 스파르타에서 아테네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동맹국들 사이에서는 아테네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라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맹국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군자금을 제공하거나 함선을 제공할 의무를 지녔습니다. 군자금을 보관하는 금고의 위치는 델로스 섬으로 정했습니다. 이때 동맹 결성을 추진하고 내용을 규정한 인물이 바로 아리스티데스였습니다. 그는 정의의 사나이라는 별명 답게 각 도시의 사정에 따라 군자금을 공평하게 부과했고 그런 그의 노력으로 순조롭게 동맹이 체결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델루스 동맹이 탄생하게 됩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은 향후 몇십년간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스파르타가 주축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대립하게 됩니다. 한편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와 공모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한번 테미스토클레스 인기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그에 대한 소문을 모두 믿기 시작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이 아테네를 위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를 상기시키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인기만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테미스토 클레스를 대신해 아테네 1인자로 떠오른 인물은 키몬이었습니다.

     

    그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아들로 테미스토클레스와는 다르게 친 스파르타 정책을 펼쳤습니다. 결국 키몬에 밀린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 투표를 통해 아테네에서 추방됐습니다. 테미스토 클레스는 한동안 아르고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파우사니아스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테미스토크레스 또한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테미스토 클레스는 이후 7년간 그리스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도피 행각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크리스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어지자 테미스토클레스는 바다를 건너 페르시아로 향했습니다. 테미스토 클레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아들로 이제막 왕이 돼 아르타크 크세르크세스에게 서신을 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폐하의 부황의 침공을 막아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폐하의 집안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 폐하의 부황께 철수하라고 미리 알려드려 큰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베푼 선행은 그 전에 제가 입힌 피해보다 더 큽니다. 그러니 저는 마땅히 그때 제가 베푼 선행에 보답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저는 폐하와 친하다는 이유로 그리스인들에게 쫓겨 여기까지 왔지만 폐하를 위해 큰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게 1년만 주신다면 그동안 페르시아어를 배워 제가 찾아온 이유를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테미스토 클레스의 서신을 받아본 왕은 그의 결단에 흡족해하면서 그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년 뒤 테미스토 클레스는 왕을 아련했는데 왕은 그를 처벌하는 대신 그의 목에 걸었던 현상금 200 탈란톤을 그에게 줬다고 합니다. 테미스토 클레스는 마그네시아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조용히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페르시아 왕이 그에게 그리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는 고민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어서 그냥 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습니다. 그는 미리 준비하거나 학습을 통하지 않고 순전히 타고난 지능만으로 당면 과제를 파악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 완전히 설명할 수 있었고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도 옳은 판단을 내렸으며 무엇보다도 미래에 가능한 이익과 손실을 누구보다 잘 예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타우사니아스와 테미스토클레스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테미스토 클레스마저 능가하는 한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정치 괴물 페리 클레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