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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페리클레스 인물 (추대사)

     

     

    페리클레스

    기원전 446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국은 30년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덕분에 양국은 얼마간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아테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력을 넓혔는데 이들의 다음 희생양은 사모스였습니다.

     

    사모스는 밀레토스와 더불어 이오니아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아테네는 사모스에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직접 함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선 페리 클레스는 여러 번의 전투 끝에 사무스를 굴복시켰습니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는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차지했습니다. 페리 클레스 자신도 이오니아 최대의 도시를 정복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 통치하에서 아테네는 번영을 이어갔습니다. 매년 델로스 동맹국들로부터 분담금이 흘러 들어왔고 아테네는 이 공금을 도시 발전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아테네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었습니다.

     

    철학 학교를 설립한 아낙 사고라스와 비극 작가인 소포 클래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같은 시대 아테네에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테네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계속해서 세력을 넓히는 걸 경계했고 동맹국들 조차도 아테네의 억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내부에서도 페리 클래스는 많은 비난의 직면하게 됩니다. 페리 클레스는 15년간 장군을 연임했기 때문에 독재자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사실 최고 결정권은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회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에게는 누구든지 비판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페리 클레스도 악담과 비난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페리 클레스라 해도 흠이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페리 클레스의 가장 큰 약점은 그읰 애처 아스파시아였습니다.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출신인 아스파시아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데다 언변도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아테네 최고의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이 그녀 곁으로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소크라테스도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스파시아와 사랑에 빠진 페리 클래스는 그녀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돕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과거 페리클레스는 양 부모가 아테네 출신이어야만 아테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그래서 약 5000명 정도가 하루아침에 시민권을 빼앗기고 노예 신분이 됐습니다. 이때 아테네 시민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원은 1만 5천명이 채 안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페리 클레스 자신도 이방인 여자 사이에서 아들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재정한 법 때문에 아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수 없게 되자 페리클레스는 다시 법률을 고쳐주길 요청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만든 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마당에 지금 와서 법을 바꾸는 건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페리 클레스가 전 부인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기자 이를 불쌍하게 여긴 시민들은 그의 요청대로 아스파시의 아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이방인인 아스파시아에게까지 너그러웠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스파시아는 신성 모독죄로 고발됐었는데 페리 클레스가 법정에서 눈물로 호소한 덕분에 겨우 그녀를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페리 클래스가 아스파시아에게 놀아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가 사무스와 전쟁을 일으킨 이유도 아스파시아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435년 먼 서쪽에서 전쟁이 발단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먼 옛날 코린토스는 케르키라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케르키라는 다시 에피담노스라는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에피 담노스를 놓고 케르키라와 코린토스 사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케르키라는 아테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이번 분쟁은 케르키라와 코린토스 간의 집안 싸움이어서 아테네가 끼어들 명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와 같은 펠로폰 네소스 동맹국이었습니다.

     

    만약 아테네가 코린토스를 공격한다면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다음으로 하는 규모의 대함대를 보유했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아테네 입장에서 케르키라는 매력적인 동맹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참전을 결정한 아테네는 20척의 함대를 케르키라로 파견했습니다. 얼마 후 코린토스가 동원한 함선 150척과 110척의 케르키라 함선 간에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아테네 함선 20척은 휴전 협정을 지키기 위해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뿐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코린토스가 승리할 것처럼 보이자. 아테네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전투에 직접 개입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방해로 전환은 코린토스의 분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결국 코린토스는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코린토스와 아테네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는 이왕 코린토스와 전쟁을 일으킨 김에 북쪽에 위치한 코린토스의 식민지 포테이 다이아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이들은 언제든지 동맹국에서 적대국으로 변할 수 있는 위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트라케아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 포테이 다이아를 탐낸 것이었습니다. 아테네가 3000명의 병력을 보내 포테이 다이아를 포위하자 코린토스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즉시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의 사절단을 보내 아테네를 비난했고 평소에 아테네의 불만이 쌓여 있었던 아이기나와 메가라도 아테네를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코린토스에서 온 사절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이여 여러분은 자신을 과신하고 다른 나라 사람의 의견에는 도무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신중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외교에는 미숙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피해를 방지하지 못하고 피해를 보고서야 비로소 동맹국을 소집한 것입니다. 아테네는 우리 동맹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를 종속시켰고 또 다른 나라를 공격 중인 지금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은 여러분이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며 더 적극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적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공격하지 않고 두 배로 커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능력 이상으로 저돌적이고 위기에도 낙천적입니다.

     

    여러분이 주춤거릴 때 그들은 바깥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집을 비우면 가진 것조차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평화로운 도시에는 전통적인 관습이 최선이지만 수 많은 문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더 이상 늦장 부리면 안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약속대로 포테이 다이아를 돕고 당장 아테네를 공격하십시오. 행동을 촉구하자. 스파르타도 아테네가 휴전협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타는 뜬금없이 저주받은 알크메우니다 가문을 아테네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알크메우니다의 가문이 저주받은 경위는 이렇습니다. 먼 옛날 아테네에서 킬론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알크메우니다 가문이 나서서 이들을 죽였는데 그 장소가 살인이 금지된 신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알크메우니다 가문은 신성 모독으로 아테네에서 얼마가 추방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200년도 훨씬 지난 일을 지금 와서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스파르타가 노린 쪽은 페리클레스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어머니 쪽이 알크메우니다 가문이어서 만약 페리클래스가 추방되며 아테네가 혼란에 빠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페리클래스가 아니었습니다. 페리클래스는 역으로 과거 스파르타가 파우사니아스를 죽였던 일을 지적하면서 그 사건의 연루된 자들을 모두 추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아테네 사절단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은 아테네에 포테이 다이아에서 철수하고 아이기나에 자주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스파르타의 또 다른 요구는 메가라 결의를 철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메가라는 아테네와 코린토스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 이 시기에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페리클레스의 미움을 사고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메가라 인들을 자국에서 쫓아냈을뿐만 아니라 아테네 지배하에 있는 모든 항구에서 메가라의 상품 거래를 금지하는 메가라 결의를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메가라는 큰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스파르타가 나서서 메가라 결의를 철회하라고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물러서길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우리에게 포테이 다이아에서 물러나고 아이기나의 자주권을 돌려주고 메가라 결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더니 이번에는 다른 도시에도 자주권을 돌려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양보하면 그들은 더 큰 것을 요구해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싸우지 않고는 영토를 넓힐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여러 선과 해안 지대가 있습니다. 제해권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토와 집은 포기하더라도 바다와 도시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영토와 집을 잃는다 해도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스파르타인들과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것은 직과 영토를 잃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 중에 자진해서 새로운 위험에 말려들지 않는 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 다모스는 최대한 전쟁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스파르타의 동맹국 테베가 아테네의 혈맹 플라타이아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테베의 병사들은 플라타이아를 기습해 시내 안으로 들어왔는데 곧바로 반격을 당해 거의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더 이상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전쟁에 앞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전쟁에 대한 온갖 예언과 신탁이 난무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취향에 맞는 예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편 아직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전쟁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의 펠로폰 네소스 군을 이끌고 아테네로 향했습니다. 양국이 평화 협정을 맺은지 14년 만에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아테네의 병력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성체 배치된 1만 6천명 외에도 1만 3천명의 중무장 보병이 아테네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에만 집중했습니다. 승패가 확실치 않은 전투에 모험을 걸기 보다는 병력을 온전히 보존하는게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동안 스파르타군을 아티카 지역을 유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아티카 지역의 농부들은 대부분 아테네의 성벽 안으로 피신해 있었지만 그들이 공들여서 가꾼 농지가 파괴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분노했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나가 싸우자고 외쳤습니다. 시민들은 페리클레스에게 분노를 터뜨렸는데 이때 시민들을 선동해 페리클래스를 비난한 대표적인 인물이 클레온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리 클래스는 온갖 야유와 조롱을 견디면서 원래의 계획을 고수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가만히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함선 100척을 파견해 텅 빈 펠로폰 네소스를 약탈했고 기병대로는 적의 정찰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예상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쪽은 오히려 아테네였습니다. 아테네가 바다를 통해서 식량과 보급품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었던 반면에 스파르타는 오랫동안 펠로폰 네소스를 떠나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펠로폰 네소스 동맹군은 제대로 된 전투도 치루지 못하고 각자의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스파르타가 철근하자 페리 클래스는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그는 먼저 스파르타의 전쟁을 부추긴 아이기나에 책임을 물어 아이디나 주민들을 도시에서 쫓아냈습니다. 이렇게 한때는 아테네와 경쟁 관계였을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아이기나가 멸망하게 됩니다. 얼마 후 페리클레스는 직접 중무장 보병 1만을 이끌고 메가라를 공격했습니다. 아테네는 메가라 영토를 철저히 약탈한 다음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겨울 아테네인들은 이번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이 자리에서 페리클레스는 역사상 최고의 연설 중 하나를 일그러지는 추도사를 남겼습니다.

     

     

    추도사

    페리클레스의 추도사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는 스스로 본보기가 됐습니다. 우리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통치하는 민주정치를 펼치고 있으며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우리의 모험심에 모든 바다와 육지가 길을 열었으며 적들에게 복수하고 친구들을 도왔음을 증거하는 기념비가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여기 이분들은 바로 그런 도시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분들 중 흠이 있는 분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분들이 보여준 용기입니다. 이분들은 재산을 더 오래 즐기기 위해 겁쟁이가 되지 않았으며 언젠가 부자가 될 거라는 희망에서 목숨을 아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분들은 이 도시에 어울리는 분들이 됐습니다. 여러분은 아테네의 힘을 깨닫고 이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날마다 아테네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의무를 다하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분들을 본 받아 행복은 자유에 있으며 자유는 용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기 묻힌 분들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앞으로 국가가 전사자들의 자녀가 어른이 될 때까지 국비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용기에 보답해 큰 상을 내리는 도시에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430년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이 또다시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로 쳐들어왔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이번에도 아티카에 있는 주민들을 아테네로 불러들이고는 성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 전염병은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병했는데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거쳐 아테네까지 전파됐습니다. 때마침 많은 인구가 좁은 시내로 몰렸기 때문에 전염병은 빠르게 번졌습니다. 전염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증상으로 봤을 때 흑사병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병에 직접 걸렸었다고 밝힌 투키디데스는 병의 증상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열이 나고 눈이 충혈된다. 그러다 목과 혀에서 피가 나고 입에서 고약한 악취가 난다. 그 다음 재채기가 나며 목이 쉬었다 얼마 뒤 가슴이 아파오더니 기침이 심해졌다. 이 병이 복부까지 내려오며 복통이 일어나고 온갖 담즙을 토하게 된다.

     

    이때 큰 고통이 뒤따랐다. 피부에는 불그스레한 피멍이 들며 작은 종기가 돋아났다. 이 병에 걸리면 심한 갈증에 시달렸는데 물을 많이 마셔도 갈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이 병은 머리에서 시작해 온 몸으로 퍼졌다. 이병에 걸린 환자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이렇게 아테네는 전쟁과 전염병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전염병의 피해는 대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치료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거리는 죽은 사람의 시신으로 넘쳐났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아테네는 주민의 3분의 1가량을 잃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스파르타군도 전염병이 무섭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타군은 40일 정도만 머물다가 예정보다 빨리 본국으로 철수했습니다. 아테네가 전쟁과 질병으로 큰 고통을 당하자 시민들은 다시 한번 페리클레스에게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재앙이 페리클래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 앞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을 지배하는 사람은 누구나 미움을 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기에 구애받지 않고 원대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미움은 오래가지 않지만 연관과 명성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투표를 통해 페리클레스의 지휘권을 빼앗고 그에게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한 사람은 클레온 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진정되자 사람들은 다시 페리클래스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봐도 페리 클래스만한 인물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페리클레스를 다시 장군에 임명하고 그에게 정치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얼마 안되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투키디데스는 그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명만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이자 청년 결백한 것으로 유명해 대중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는 높은 명성을 이용해 대중에게 화를 내며 그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었다. 그는 시민들이 지나치게 자만하는 걸 보며 충격적인 말로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그들이 낙담하면 용기를 불어넣곤 했다.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아테네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가 죽고 여러 인물들이 나타났지만 그 누구도 페리 클래스를 대체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페리클레스와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알키비아데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