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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메소포타미아의 성장 바빌로니아 권력 변화

     

     

    바빌로니아 역사적 전환

    기원전 2300년 사르곤은 수메르와 아카드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가 통치한 이 지역은 이후 바빌론의 이름을 따 바빌로니아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가 이름을 빌린 도시 바빌론은 아직 기록에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 불과 했습니다. 사르곤은 바빌로니아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진군해 서쪽으로는 지중해 그리고 동쪽으로는 엘람까지 영토를 확장했다고 합니다. 특히 엘람은 이란 남부 지역에 위치했던 고대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라이벌 관계였을 정도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르곤은 생전에 총 34번의 전투를 치렀다고 하는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뛰어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르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나람 신의 통치하에 아카드는 최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나람신은 심지어 이집트까지 쳐들어가 이집트의 왕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람신의 뒤를 이은 아카드 왕들은 유약한 인물들이었고 아카드는 이란의 산간 지역에 사는 유목 민족이었던 구티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구티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바빌로니아 기록에서는 구티족을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인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승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짧은 암흑기를 거친 바빌로니아 는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점차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100년 영웅의 도시 우루 크 출신의 우투헤갈이 구티족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우투헤갈의 친척이자 우르의 총독이었던 우르 남무가 우투헤갈을 배신하고 정권을 장악해 새로운 제국을 탄생 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제국을 우르 제3 왕조로 알고 있습니다. 우르 남무와 그의 아들 슐기는 총 65년의 통치기간동안 외부세력을 물리치고 도시를 재건하면서 바빌로니아 지역의 부흥기를 이끌었습니다. 우르남무와 슐기는 제국을 통치 하기 위해 철저한 관료체제를 도입했는데 정확한 기록을 위해 길이와 무게 단위를 표준화했고 관료체제 에 필요한 관리를 양성할 목적으로 교육이 강조됐습니다. 이들은 또한 인류 최초의 법전을 제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슐기는 자신의 업적이 자랑스러웠는지 스스로를 칭송하는 기록을 많이 남겼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적능력은 완벽해서 내게 문제될 것이 없다. 내가 마음 먹고 뛰면 가젤을 추월할 수 있다. 지적인 나는 왕의 최고봉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과거 어떤 왕들보다 뛰어나다. 내가 하는 말은 항상 수메르는 기원전 2500년에 인구의 최대 80%가 도시에 거주할 만큼 고도로 도시화된 사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수메르인들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고 도시생활을 하지 않는 민족은 야만족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천연자원이 부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무역을 통해 주로 목재, 금속, 청금석 등을 수입했고 곡물과 직물 등을 수출했습니다. 무역거래와 교역이 바빌로니아 경제에 큰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거래기록과 업무내용을 기록한 점토판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시대 상인이 물건 값을 요구하는 내용의 점토판을 읽어보면 오늘날 서신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점토판에 쓰인 내용 일부를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 집에서 물건을 가져갔을 때 물건 값을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수르에는 끔찍한 기근이 들어 아무것도 먹을 게 없습니다. 부디 당신이 가져 간 직물의 양만큼 물건 값을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듯이 이때도 사업이 망해 빚을 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럴 때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종종 가족 중 한명을 노예로 팔 거나 스스로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법이 정한 3년의 노예 생활 후에 자유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 범죄자 나 전쟁포로들이 노예가 됐는데 가끔 노예가 반항할 경우 장님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예는 사고 파는 것이 가능했는데 평균 가격은 은으로 50셰켈 정도였습니다. 당시 평균 노동자 연봉이 은 10셰켈 정도 였던 걸 감안하면 꽤 비싼 가격이 었습니다. 노예 위에는 자유민이 있었는데 이들은 국가로부터 식량과 토지를 받는 대신 노동과 군역을 제공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 어떤 노예와 그의 주인이 나눈 대화가 기록됐는데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주인이 노예에게 말했습니다. 노예야 내 마차를 준비해라. 주인님의 위세가 다른 사람들을 압도해 왕자님께서 주인님을 주목할 생각해보니 안가는게 좋겠다. 네 주인님 가지 마십시오. 왕자님이 주인님 께 어려운 임무를 맡길지 모릅니다. 주인은 다시 노예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부정직한 일을 그러십시오. 주인님 그러십시오. 부정직한 일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입고 무엇으로 배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노예야 나는 부정직한 일을 하지 않겠다. 주인님 부정직한 일을 하지 마십시오. 부정직한 일을 하다 걸리면 처형당하거나 산채로 가죽이 벗겨질 수 있습니다. 주인은 다시 노예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자와 사랑에 좋은 생각입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 모든 슬픔과 걱정을 잊을 수 있다. 아니다 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 주인님 여자를 사랑하지 마소서. 여자는 함정이자 구덩이 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긋는 칼과 같습니다. 주인이 노예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지를 묻자. 우유부단한 주인이 답답했던 노예가 이렇게 강에 몸을 던져 죽으십시오. 제국을 잘 이끌었던 슐기가 죽자 강력했던 우르 제3 왕조 또한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르 제3 왕조가 힘을 잃은 이유는 남부 수메르 지역이 염류화와 가뭄으로 인해 황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르와 우루크는 과거에 번영했었던 수메르 도시들이 힘을 잃었고 그 빈자리를 북쪽의 신흥 도시들이 메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도시들 중 하나가 바빌론이었습니다. 기원전 2004년 엘람과 구티족 연합군의 공격으로 우르가 함락되자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다시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힘을 겨루게 됩니다. 이때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는 남쪽 의 라사와 이신 그리고 북쪽의 바빌론 에슈눈나 그리고 마리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마리에서 이루어진 대대적인 발굴 작업으로 인해 수많은 점토판들이 발굴됐는데 이중에는 마리의 왕 지므리 림이 아내와 딸들과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습니다. 딸들 중 한명인 에리쉬티 아야는 아버지에게 불평하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제가 항상 항상 말했잖아요 항상. 작년에 서신을 보냈을 때 아버지는 제게 여자 노예 2명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명이 죽어 여자 노예 2명을 더 보내 셨는데 그 중 한명이 또 죽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집안의 상징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제가 이런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리의 왕 지므리 림과 동맹을 맺은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는 기원전 1787년 우루크와 이신을 점령 했습니다. 기원전 1763년 라사를 점령해 수메르 지역을 평정한 함무라비는 이듬해인 1762년 에슈눈나마저 점령해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7년 뒤인 기원전 1755년 동맹이었던 마리 마저 병합한 함무라비는 마침내 바빌로니아 전 지역을 통일하게 됩니다. 함무라비는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한 거로도 유명한데 우르 남무 법전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졌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억압받는 자들은 이 비석 앞으로 나와라. 여기 새겨진 글을 읽고 내 고귀한 말들을 이해하라. 이 글을 읽는 자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며 그의 마음은 함무라비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고대 바빌로니아로 알려진 이 신흥 왕국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서쪽에서는 철기로 무장한 히타이트와 공포의 제국으로 알려진 아시리아가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