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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아테네 키몬과 페리클레스

     

     

    키몬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기세를 몰아 바다에서도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러자 이오니아와 아이홀리스 그리고 에계헤에 있는 많은 도시들이 그리스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본 건 아테네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리스의 맹주는 단연 스파르타였습니다.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스파르타는 그리스 연합군의 대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테네는 가장 많은 함선을 보였음에도 군의 지휘권을 항상 스파르타의 양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 특유의 결정 장애와 지휘관의 기행으로 스파르타의 인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 합류한 도시 대부분이 스파르타가 아닌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막대한 재원과 군사력을 등의 업은 아테네는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경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아테네 내부에서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추방되고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키몬이었습니다.

     

    키몬는 아버지 밀티아데스로부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았습니다. 기원전 476년 동맹국의 총사령관이 된 키몬은 트라케아에 있는 페르시아의 마지막 보루 에이온을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키모는 유럽에 남아있던 페르시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게 됩니다. 키몬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아시아 도시들을 공격했고 아직 항복하지 않은 도시들은 그리스의 토왕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오니아의 모든 지역에서 페르시아군은 자치를 감추게 됩니다. 기원전 466년 그리스의 위협을 느낀 페르시아는 소아시아 남부 판필리아 지방에서 대군을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키몬은 적이 쳐들어오는 걸 기다리는 대신 200척의 그리스 함재를 이끌고 적을 선제 공격했습니다. 바다와 육지에서 맞붙은 양국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결과는 다시 한번 그리스 군의 완승이었습니다. 거듭된 패배로 페르시아 왕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그리스 땅 근처에 있는 육해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조건으로 그리스와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페르시아가 이렇게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오니아는 오랫동안 페르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계속된 전쟁이 지친 동맹국들 사이에서 조금씩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페르시아군이 물러난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동맹국들은 그러면서 군비는 부담하되 군대는 더 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아테네 통보했습니다. 아테네의 장군들은 억지로 군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불만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키몬은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대처법을 내놨습니다. 동맹국들이 원한다면 군을 보내지 않는 대신 군비를 부담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아테네가 양보한 것처럼 보였지만이 조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전쟁을 잊은 동맹국 주민들이 농사일이나 장사 같은 일상의 몰입해 있는 동안 키몬은 아테네 시민들을 전쟁과 훈련으로 단련시켰습니다. 게다가 동맹국이 정기적으로 보내온 군비는 아테네를 더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동맹국들이 안주하고 있는 사이에 아테네의 국력은 무섭게 팽창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델로스 동맹국들은 아테네 소국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키몬은 군사적 성공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많은 재산을 얻었을뿐 아니라 그 재산을 아낌없이 아테네 시민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는 자기 농장을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해서 마음껏 곡식과 과일을 다 먹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는 곳 주변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시장을 걸어다니다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손에 돈을 가득 쥐어주기도 했습니다. 두 말할 거 없이 키몬은 아테네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키몬에게도 에피알테스라는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에피알테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청렴하고 공정한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키몬이 귀족으로 대변되는 보수파의 우두머리였다며 에피알테스는 일반 시민이 중심이 된 민중파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에피알테스의 업적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레오파고스 회의를 약화시킨 것이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고위 귀족으로 이루어진 단체로 국정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에피알테스는 이들의 권한을 축소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기원전 465년 타소스가 델루스 동맹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키몬은 함대를 이끌고 타소스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키몬이 원정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오자 에피알테스는 뇌물 수수 혐의로 그를 고발했습니다. 키몬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의 높았던 명성에 흠집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한번 키몬의 인기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여러가지 소문을 퍼뜨리면서 그를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키몬을 미워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스파르타의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파르타를 칭찬했는데 아테네 시민들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스파르타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5채의 집만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됐을 정도로 스파르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이 혼란을 틈타 스파르타의 노예 계급이었던 헬롯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300명의 스파르타 부대를 전멸시키고 요새 안으로 들어가 장기간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위기에 빠진 스파르타는 다른 도시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도 파병을 요청했는데 에피알테스는 스파르타가 쓰러지게 내버려둬야 한다면서 파병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키몬은 부대를 이끌고 스파르타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테네군의 용맹하고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본 스파르타인들이 갑자기 겁을 먹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키몬이 스파르타에서 망신을 당하자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에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특히 평소 스파르타의 호의적이었던 키몬이 시민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페리클레스

    결국 키몬은 도편 재판을 통해 아테네에서 10년간 추방됐습니다. 그리고 키몬을 대신해 에피알테스가 아테네의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얼마 안가 반대파가 고용한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에피알 테스가 죽고 새롭게 권력을 잡은 인물은 페리클레스였습니다. 에피알테스의 친구였던 페리클레스는 키몬을 추방할 때도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페리클레스는 크산티포스와 알크메우니다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머리가 길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놀릴 때는 알뿌리 머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도 머리가 컴플렉스였는지 그의 조각상을 보면 모두 머리에 투구를 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명문 가문 출신답게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다몬을 스승으로 뒀었는데 그는 유능한 괴변 철학자로 코치가 선수를 훈련시키듯이 페리클레스에게 정치수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는 변증법에 창시자로 알려진 제논과 이성을 강조한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이들에게 품위있게 행동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페리클래스가 대중 앞에 서면 차분한 말투와 고상한 내용으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모습은 페이시스트라토크 모습을 연상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페리클레스는 부끄러움이 많아서 좀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중대한 일이 있으면 직접 나서기보다는 친구들을 시켜 일을 처리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죽은 에피알테스도 그런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즉 에피알테스의 배우에서 키몬을 추방하고 아레오 파고스 회의를 약화시킨 인물이 바로 페리클래스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에피알테스가 죽은 이상 페리클래스가 직접 전면에 나서야 했습니다. 정권을 잡은 그는 먼저 민심을 얻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과거 팀원이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민심을 찾던 반면 페리클레스에게는 그만한 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정부의 돈을 시민들을 위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축제와 운동 그리고 연극을 열어 시민들을 즐겁게 했고 수많은 신종과 건물을 지어 아테네를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도 이때 지어졌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이를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델로스의 보관돼 있던 공금을 아테네로 옮겨왔습니다. 이 공금은 델로스의 동맹국들이 함께 부담하는 전쟁 비용이어서 당연히 아테네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페리 클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막아내는 한 공금을 어떻게 쓰든 무슨 상관이요. 그들은 군인이나 배도 제공하지 않고 다만 돈만 보냈으니 아테네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소.

     

    아테네는 전쟁에 대비해 모든 것을 갖추고 그리스를 지켜주고 있소. 그러니 남은 돈으로 건물을 짓고 공사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여러 기술을 발달시켜 아테네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요. 아테네의 도시는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보고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기원전 458년 스파르타가 군을 출정시켜 보이오티아까지 진출하자 아테네도 군을 파견하여 타나그라에서 맞붙었는데 스파르타가 승리했습니다. 이로써 아테네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과거 수많은 공적을 세웠던 키몬을 떠올리면서 그를 추방한 걸 후회했습니다. 시민들이 키몬을 그리워한다는 걸 알게 된 페리클레스도 키몬이 아테네로 돌아오는 걸 허락했습니다. 키몬은 돌아오자마자 전쟁을 중단시키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화해시켰습니다.

     

    스파르타는 페리클레스에게는 악감정이 있었지만 키몬과는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키몬은 함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로 원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이나로스라는 인물이 페르시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스스로 통치자가 되더니 바다 건너 아테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마치 마테네 함선 200척이 키프로스를 공략 중이었는데 이들은 키프로스를 떠나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반란 세력과 합산한 아테네군은 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했고 살아남은 페르시아인들은 멤피스 성벽 안에서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아테네군은 성을 차지하는데 애를 먹어서 무려 4년간 그곳에서 시간만 낭비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페르시아군이 대군을 조직해 반격을 가하자 아테네군은 크게 패해 이집트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때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던 병사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니 아테네는 재난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리스 본토에서도 상황은 아테네의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47년 보유오티아에 이어 메가라와 에우브이아 성까지 한꺼번에 아테네의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포착한 스파르타군도 아테네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스파르타군은 아티카 지역을 마음껏 약탈했지만 얼마 후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페리클레스가 뇌물로 매수한 덕분에 스파르타군이 철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파르타군이 철수하자 페리클레스는 군을 이끌고 에우보이아를 공격해 섬 전체를 복속시켰습니다. 에우보이아 공략이 끝나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서 빼앗은 도시들을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스파르타와 30년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