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독립 전쟁
결국 1567년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펠리페 이제 통치의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이후 80년 전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처음 반란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스페인은 반란을 쉽게 잠재우는 듯 했습니다. 이는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했지만 이 반란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쉽게 초기에 진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지역의 파견한 알바 공작은 필요 이상의 강한 진압으로 인해 오히려 네덜란드 지역 사람들의 반감을 더욱 키워 버립니다. 그는 일명 문제 처리 협의회를 설치하고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과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시작하는데 이 회의는 곳 피의 협의회 라고 불릴 만큼 강한 처벌을 시행하게 됩니다. 이 협의회는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조사해서 그 중 1000명을 사형시켰습니다. 또한 스페인 인구는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점령하고 시민들을 학살하는 한편 점령의 어려움을 겪는 도시들은 포위를 한 채 도시가 고사 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를럼이라는 도시는 무려 7개월 간 이나 포위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반란군에 대한 강한 진압을 실행하자 이후 점차 네덜란드 지역 내에서 스페인과 타협을 원하는 쪽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쪽이 나뉘게 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지리적 차이에 따른 종교의 분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가톨릭을 믿는 남쪽 지역은 점차 스페인과 타협을 원하던 반면 개신교를 믿는 세력이 더 강했던 북쪽 지역은 스페인으로부터 의 독립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뉜 지역 중 스페인과 타협하기를 원한 남쪽 지역 대부분이 훗날 벨기에 지역에 속하게 되고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북쪽 지역이 오늘날의 네덜란드의 뿌리가 됩니다. 이 지역의 대표들은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맺고 스페인에 맞서 통일된 정치 단위를 갖추게 됩니다. 이 동맹에 참여했던 지역 중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홀란드 입니다. 흔히 네덜란드를 홀란드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끌었던 이는 오라녜 빌럼이었습니다. 그는 몇 년 후인 1584년 펠리페 2세와 카톨릭을 지지하는 한 청년에 의해 암살되기 전까지 네델란드의 독립전쟁을 이끌었습니다. 오라녜 빌름이 암살되고 스페인과 타협하기를 선택한 남쪽 지역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로 선택한 북쪽 지역이 분리되기로 시작한 이후 전쟁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국지전 양상을 나타내었습니다. 독립을 선언한 네덜란드는 비록 스페인과 계속 전쟁 중이긴 했지만 양쪽 모두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전쟁에 위한 피로감 때문에 더 이상의 전면전을 피했습니다. 이에 1609년 양쪽은 공식적으로 휴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휴전 조건으로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네덜란드는 독립국가로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9년 후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다시 전쟁을 시작하게 되지만 네덜란드의 독립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1648년 30년 전쟁을 마무리 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참가한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 과정에서 네덜란드 독립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당시 수많은 정치 세력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메인 세력들 끼리의 협상이 오래 걸리자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뮌스터에서 따로 모여 1609년의 당시 조건에 기반해서 조약을 체결 합니다. 30년에 걸친 유럽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은 이미 어느정도 당연시 되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고 자국 역사에 있어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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