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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스페인 통치에 종속된 네덜란드 종교적 갈등

     

     

    종교 갈등

    16세기 초반까지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지역은 특히 스페인의 통치권 아래에 놓여있었습니다. 스페인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스페인의 왕은 자신을 대신해서 이 지역에 통치를 담당할 통치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긴 했지만 실제로 네덜란드 지역의 정치는 상당 부분 각 지역이 자발적으로 담당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네덜란드 지역이 스페인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정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매번 스페인 왕에게 보고한 후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17개에 작은 지역 단위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자치권을 누리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들은 무엇보다도 상업활동을 통해 큰 경제적 이익을 쌓을 수 있었ㅆ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북유럽 지역의 국제 무역은 북독일 지역에 기반한 한자 동맹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네덜란드 지역의 상인들이 한자 동맹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이 지역의 국제 무역을 통해 부를 쌓는 데 성공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네델란드의 대표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는 암스테르담은 발트해 지역의 국가들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사이에 교육을 중계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16세기 초 중반까지 네덜란드 지역은 공식적으로는 스페인의 왕의 통치를 받고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각 지역의 상인 세력들과 귀족들이 주도하는 크고 작은 17개의 정치적 단위들에 의해서 상당 부분 자치권을 누리고 있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16세기 초까지 스페인과 네덜란드 지역이 나름대로 공생하는 관계였다면 16세기 초 중반이 지나면서 두 지역은 점차 긴장 관계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 어떤 카를 5세의 등장 때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지역에서 태어났던 카를 5세는 네덜란드 지역에 보다 강한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이 지역을 자신을 대신해서 통치할 대리인들을 보내고 군사를 보내 주의 지역을 정복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실제로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군사적 활동은 동시에 스페인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네덜란드 지역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군사적인 활동은 그다지 반가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카를 5세의 군사적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던 이 지역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히 네덜란드 지역이 카를 5세에 통치 지역 중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카를 5세의 군사적 활동 때문에 자신들 지역의 군대가 주둔하는 것 역시 상대적인 자치권을 누리고 있던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외에도 네들란드 지역의 사람들이 카를 5세와 스페인 적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1517년 루터와 함께 시작된 종교 개혁이었는데요. 네덜란드 지역은 강한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새로운 교리가 들어오는것을 강압적으로 막을 통치자가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루터와 칼뱅의 새로운 교리를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서 비교적 빠르게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기존의 카톨릭의 영향력이 약했던 북부쪽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권위의 상당부분이 가톨릭에 기반했던 카를 5세는 네들란드 지역에서 개신교가 빠르게 퍼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네덜란드 지역의 종교 재판소를 열고 그곳에 개신교 세력을 탄압했습니다. 이것 역시 네덜란드 지역의 사람들이 스페인에 대한 강한 반발감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 지역 사람들의 반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카를 5세는 1556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후임으로 스페인의 왕 위에 오른 필리페 2세는 1559년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이전까지 스페인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프랑스와 화해를 합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지역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화해가 이후 네덜란드 지역의 역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프랑스와의 사이가 개선되자 스페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큰 비용을 지출 하면서 네덜란드 지역에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적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서 네델란드 지역에 군대를 대치해 유사시에 여러 방향에서 공격 또는 수비를 할 상황을 대비하여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이후 네덜란드 지역에 주둔한 군대를 줄이면서 동시에 카를 5세 보다 더 강력한 종교개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합니다. 게다가 그는 개신교 세력에 맞서기 위해 네덜란드 지역의 가톨릭 교회 역시 개혁 하겠다면서 네덜란드 지역에서의 교구를 개편 했는데 이 과정에 필요한 자금을 네덜란드 지역의 부유한 수도원 들로부터 충당하기로 결정하면서 개신교 세력 뿐만 아니라 가톨릭 세력으로부터도 강한 불만을 사게 됩니다. 펠리페 2세는 동시에 이전에 관례를 따르지 않으면서 네덜란드 지역의 크고 작은 정치적 단위 이들이 상대적으로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무시하고 이 지역의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보다 강하게 반영되도록 시도했습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안그래도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종교적 갈등이 점차 정치적 갈등으로 증폭된 상황에 더욱 불을 지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펠리페 2세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한 펠리페 2세 누이였던 마가렛은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 일부 교회에서 개신교 교도들이 예배를 할 수 있게 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소한 양보들을 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 지역에 직접 머물렀기 때문에 현재 사정을 잘 알고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펠리페 2세에게 개신교에 대한 탄압 강도를 줄이라는 요청을 하게 되지만 필리페 이제는 이런 요청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