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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이탈리아 통일의 초석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향

     

     

    이탈리아 통일의 초석

    이탈리아는 우리에게 고대 로마제국의 본거지로 써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 이탈리아 역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9세기 이탈리아가 어떻게 통일 되었는지에 대해서 정리하였습니다. 근대 이후 통일된 이탈리아를 꿈꾸며 일어난 첫 시도는 프랑스 혁명과 함께 발생했습니다. 1792년 프랑스에서 공화국이 선포되고 자 이탈리아에서도 통일된 이탈리아를 꿈꾸며 프랑스 혁명을 이탈리아의 이식하고 자 했던 이들이 있었던 것인데요 이탈리아의 자코벵이라 불렸던 이들은 토리노, 나플리 그리고 팔레르모 등지에서 봉기를 일으켰지만 아직 혁명에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이탈리아 였기에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등장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원정을 벌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의 여러 개의 작은 위장 국가들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이탈리아를 더욱 쪼개 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의 살고 있던 이들은 나폴레옹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감을 느꼈지만 이와 동시에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비로소 이탈리아에서도 근대적인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토머스 니퍼다이는 독일 현대사를 다룬 자신의 걸작 통일 독일사 3부작의 첫 문장을 태초의 나폴레옹이 있었다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태초에 빛이 있었다라는 성경 구절을 패러디한 동시에 독일 현대사의 시작을 프랑스인이 나폴레옹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발적인 문장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이후 통일된 민족 국가를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에서 니퍼다이의 이 문장은 상당 부분 근대 이탈리아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패배한 이후 오스트리아의 주도하에 유럽 열강들은 빈에서 전후의 질서를 어떻게 세울지 논의 합니다. 그 결과 탄생한 빈 체제에서 이탈리아는 다시한번 강대국들의 주도하의 분열의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빈 체제의 결과 이탈리아 남부에는 스페인이 장확하는 2개의 시칠리아 왕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왕국이 세워지게 됩니다. 게다가 이탈리아 중부에는 교황의 지배하에 있는 교황령이 있었고 북서부에는 사르데냐 왕국이 있었습니다. 1820년 대를 거치며 양시칠리아 왕국과 사르데냐 왕국에서 빈체제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런 봉기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통일된 이탈리아를 꿈꾸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주세페 바치는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프랑스 마르세유 로 막명 그곳에서 청년 이탈리아라는 정치 모임을 결성하고 공화정에 기반한 통일된 이탈리아의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주세페 가리발디 또한 이 시기 청년 이탈리아에 합류하여 피에몬테, 볼로냐, 칼라브리아, 리미니 지역 등에서 봉기를 주도 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통일된 이탈리아를 꿈꾸면서도 이후 이탈리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했습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들이 왕이 없는 공화정 체제를 꿈꿨다면 조금 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입헌군주제를 보다 안정적인 정치 체제로 선호했습니다. 청년 이탈리아에 맞서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모임에는 훗날 가리발디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카보우르와 같은 정치인들이 활약했습니다. 이후 부활이라는 단어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 시기의 자체를 일컫는 대명사로 쓰이게 됩니다. 한편 1840년대 를 거치며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점점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1848년에 전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1848 혁명은 그러한 움직임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1848 혁명의 시작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2월 혁명 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미 한 달 전에 시칠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에서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르데냐 왕국의 왕이 었던 카를로 알베르토는 점점 거세지는 혁명의 물결을 목도하면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1848년 3월 4일 자신의 왕국의 헌법을 도입한 것입니다. 혁명의 물결이 더욱 거세져서 왕정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발빠르게 스스로 입헌 군주제를 선포한 것입니다. 비록 국민들의 대표가 모여서 논의한 끝에 탄생한 헌법이 아니라 위로부터 왕으로부터 선포된 헌법이라는 한계를 지니지만 이러한 조치를 통해서 사르데냐 왕국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있어서 다른 왕국들에 비해 이탈리아인 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는 왕국으로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