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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홍수, 토지 창출, 사회적 실험 (네덜란드 간척사업)

     

     

    자위더르해 간척 사업과 시대적 변화

    20세기 이르면 네덜란드의 간척 사업은 더욱 더 규모가 커졌습니다. 북해 지역의 인근한 자위더르해 라는 지역에 대한 사업이 대표적 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잦은 대규모 홍수로 인해 이전부터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가겠습니다. 예를 들어 1287년에는 홍수로 인해 무려 5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 될 정도였고 1420년에는 70개가 넘는 마을이 침수 됐습니다. 이후 지형의 변화로 바다와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호수였던 이 곳의 크기는 무려 6700 제곱km 이기 때문에 물을 퍼낼 생각은 산업화 이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상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연이은 대규모 공사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되던 정부와 시민들은 1886년 자위더르해 협회를 창설에 필요한 자본과 봉사를 위한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협회에서 제안된 내용에 자위더르해는 면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모든 물을 퍼 낼 수는 없었고 북서 북동 남동 그리고 남서쪽 4곳에 서로 떨어진 간척지를 개발 할 계획이었습니다. 협회를 중심으로 공사가 추진되었지만 큰 규모의 공사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사회적으로 찬반이 심하게 갈렸습니다. 이런 갈등은 1916년 또 다시 이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면서 일단락 되었습니다. 반복된 홍수로 각종 피해가 발생하면서 공사를 반대하는 측은 명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역시 공사의 진행에 영향을 주는 데에 전쟁으로 인해 심해진 식량을 새로 생겨난 농경지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상 공사는 긴 준비 과정을 거쳐 1927년에 할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안쪽의 물을 바다로 부터 차단하기 위해 약 32km 길이의 댐을 건설해야 했습니다. 매일 최대 만명 평균 4천 명의 노동자가 동원된 끝에 5년 후에 댐이 완성 되었는데 이 시기는 세계경제가 대공황의 직격탄을 받았을 때문에 공사는 의도치 좋지 않게 실업난을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을 줬습니다. 한편 바다로부터 차단된 지역의 간척지를 만드는 공사도 이루어졌는데 앞서 언급된 대로 공사는 여러 지역에 나눠서 시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완성 시기도 각각 달랐습니다. 가장 빨리 완성된 북서쪽 지역은 1930년대 초에 이미 공사가 일단락 되었고 늦은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공사가 지지부진했다가 1950년대 가 되어서야 마무리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의 이루어진 자위더르해의 공사는 19세기 때 공사와는 또 다시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공사 결과 새로 생겨난 토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문제가 잘 보여줍니다. 이전까지는 앞서 설명드렸던 것처럼 공사비용을 발현한 투자자들이 공사의 이익을 독점 했다면 이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이는 정부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사회의 지배적 이론에 따른 것이었는데 공사 초기의 한 기록을 보면 공사의 이익을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던 이전 방식이 국가의 책임에 관한 현재의 지배적 여론과 명백히 모순되었다는 말을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 국가가 새로 생겨날 토지를 관리할 방식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로 이 토지로 이주할 사람들을 어떻게 뽑을 것인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국가가 토지 운영을 책임지기 때문에 능력이 뛰어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할 의지도 강한 사람들을 뽑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사회 전체가 지불한 돈을 가지고 국가가 공사를 시행하고 공사의 결과가 발생하는 이익을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목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아무나 새로운 곳에 정착할 농민으로 뽑았다가 이들이 적응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들로부터 재산상태 뿐만 아니라 기술력도 시험했고 가족 전체의 건강상태도 증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가족이 평소에 얼마나 검소하게 그리고 청결하게 사는지 검사하기 위해 지원자의 집을 담당공무원이 불시에 방문하면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 20세기 초중반에 이루어진 간척 사업이 일종의 사회적 실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평소 이루어지는 이주나 공사와는 달리 간척 사업의 경우 무에서 유로 토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었기에 이전부터 내려오던 각종 사회적 경제적 범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백지 상태의 땅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극단적 자유주의 진영과 극단적 사회주의 진영 모두 새로운 간척지에 자신들의 이념을 실험 하기를 원했습니다. 한편 공사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정착민들이 이주 한 후 간척지는 실제로 시험장에 가깝게 운영 되었는데 이때 시험장은 정치적 시험장 보다는 학자들의 실험장에 가까웠습니다. 정부가 이 책의 관리를 스매딩, 매수 그리고 루브르크라 는 3명의 농학자들에게 맞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실험하고 확인하기 위해 정착민들이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효율성과 전문성이 가장 우선한다는 원칙하에 새로운 정책민들의 지방자치 참여 자체를 막았는데 2, 3천명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통치에 참가하는 것으로부터 배제 된다는 것이 과연 정말 그렇게 나쁜 일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것이 업무가 오류없이 돌아가도록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더욱 그렇다라는 담당자의 말을 보면 당시 새로운 간척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능력이나 기술이 뛰어난 정책민들이 역설적으로 권리를 억압받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당연히 사회적 비판을 불렀습니다. 이런 비합리적 상황은 최초 이주가 시작되고 10년 가까이 지난 1940년 때가 되어서야 해소 되었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네덜란드의 간척 사업은 일차적으로는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지리적 조건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는 중세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대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