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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

노량해전,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

     

    노량해전은 죽음의 바다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장군들의 많은 목숨을 빼앗아가기도 했으며 일본 수군에게도 전멸에 가까운 사상을 입힌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만큼은 이순신 장군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불린 해전입니다.

     

    노량해전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 최후의 일전으로 이순신이 왜군을 마지막까지 격파 하다가 전사한 해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신 것도 있지만 노량해전 자체만 보더라도 동아시아 역사에 남을 만한 대규모 해전이었습니다. 매년 개봉하는 영화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인 노량의 부재는 죽음의 바다인데 일본군 전함은 200척의 배가 침몰하고 일본군은 군사 만 1만 명이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노량 : 죽음의 바다 영화정보

     

    이때 일본 수군은 500척에 달했고 조선 함대는 판옥선만 80척 조선을 도와 참전한 명나라 수군이 300척이었습니다. 작은 배들까지 포함한다면 양측이 합치면 1000대 가까운 대규모 해전이었습니다. 즉 노량해전은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모든 해전 역량을 총 동원한 전대미문의 해전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재침략

    임진왜란 1592년 5월 23일 부터 1598년 12월 16일 이때는 조선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임진왜란 당시 몇 년을 이어온 일본군의 침략은 전쟁 3년이 지나자 잠시 휴전 되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1597년이 되자 그들은 대규모 재침략을 했습니다. 정유재란입니다. 14만의 일본군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정유재란 위기에서 이순신은 단 두 척으로 적 대함대를 격파해 버렸습니다. 이 전투로 일본 수군은 멈칫하게 되었습니다. 그 틈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순식간에 다시 재해권을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이순신 때문에 차질이 생긴 일본군은 또 전선이 지지부진 해졌고 결국 나중에는 나오지도 못하고 성에 틀어박혀 수비하는 입장에 몰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1598년 8월 일본군에게 모든걸 뒤바꾸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당시 61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침략을 진두지휘한자가 사망 했습니다. 우두머리가 죽으면 모든걸 중단하는 일본군은 전쟁 의욕을 잃었고 본국에서도 조선해 일본군 들에게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일본군은 짐을 싸서 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니까 조성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땅을 죄다 파괴해 놓고 이제와서 그냥 돌아 간다니 당연히 이대로는 안돼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아서 조선을 유린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것이 노량해전이었습니다. 조선의 왜성은 크게 세 개가 있습니다. 이 중 울산왜성, 사천왜성에서 일본군이 본국으로 가는데 장애물이 없어서 무리없이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천왜성은 많이 달랐습니다. 이곳에 바로 성웅 이순신의 함대가 왜군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본군 포위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과 함께 순천 왜성을 일찌감치 공격해 오고 있던 터 인데 너무 굳세게 저항하는 데다 명나라 군이 헤매고 있어 무너뜨리지 못했고 이에 이순신은 의지를 발휘하여 이들이 고위 돌아가지는 못하도록 포위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포위당한 일본군 지휘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고니시 유키나가 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에 가장 먼저 앞장서서 한양을 함락시키고 평양까지 진격했던 선봉장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니시의 귀국은 이순신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고니시는 고향에 가고 싶을 뿐 더러 자신의 주군인 히데요시가 죽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후계자를 둘러싸고 다툼이 있을 터인데 조선에 묶여 있으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니시는 계략을 사용합니다. 당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과 함께 일본군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고니시는 이중 약한 고리인 명나라 측의 접근해서 뇌물을 주어 빠져나가려 한 것이었습ㅂ니다. 이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리는 뇌물을 받고 명나라 병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고니시에게 문제는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굳게 버텨서 회로를 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니시는 결국 강제로 포위을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일전을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일본군 장수를 끌어들여 이순신을 뚫을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그가 연락을 취한 자는 시마즈 요시히로 라는 장군이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수군에게는 원수인 것이 그 조선 함대가 전멸을 가까운 피해를 입은 원균이 이끌었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함대를 격파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군사는 일본 내에서 가장 용맹한 부대라고 평가 받았고 무려 500척 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마즈가 고니시의 연락을 받자 시마즈의 함대는 이를 수락합니다. 이순신을 격파하고 아군을 구출하는 것은 누가 봐도 큰 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니시가 포위된 상태에서 시마즈에게 연락은 정황상 명나라 제독에진린이 뇌물을 받고 일본 연락선을 못 본 척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관련 서적에서는 기술 합니다. 그렇게 시마즈 500척 대함대가 쳐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순신에게 도 큰 위협이 되었던 이유는 포위된 고니시 함대는 300척 이었으며 시마즈 까지 합치면 무려 800척 이었습니다. 서쪽에서 고니시의 300 척이 동쪽에서 시마즈의 500척이 조, 명 연합군을 포위하면 그대로 가운데서 몰리게 됩니다. 물론 당시 조선 수군은 판옥선 80척 협선 120척, 명나라 수군은 함선 300척을 가졌으므로 대적할만 했지만 양면 포위를 당한다면 이순신 이라도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해전의 시작

    이순신은 결단을 내립니다. 포위를 피하기 위해 다가오는 시마즈 함대에게로 먼저 가서 격파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순신은 빠르게 출정합니다. 그런데 이때 진린은 출정을 망설입니다. 자기가 뇌물을 받았을 뿐더러 그냥 일본군을 보내줘도 되는 전투에 명나라 군대인 진린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였습니다. 하지만 진린이 생각을 해보니까 여기서 참여를 안 한다면 보기만 했다는 오명을 쓰고 입지가 추락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울며 겨자먹기로 참가했습니다. 그렇게 이순신과 그 뒤를 따르는 진린 함대는 시마즈 함대가 오는 길목인 노량해협에 매복하여 그들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시마즈의 500척 대함대는 서서히 노를 저어 왔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어두운 새벽 2시 야음을 틈타 시마즈 의 함대는 숨죽이고 노량해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건너면 고니시의 순천왜성에 빠르게 가서 조, 명 연합함대를 포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바다는 매우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함대가 이순신 함대를 조우하며 이는 180도 바뀝니다. 굉음이 울리고 불꽃이 난무하게 되면서 삽시간에 바다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조선 함대가 시마즈 함대에 포를 쏘고 노량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함대가 매복한 것을 깨달은 시마즈는 매우 놀랐습니다. 처음에 그는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일본 제일의 용맹을 가진 부대 이순신 함대를 뚫어 내기로 합니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죽도 부근에서 해전이 전개 되었는데 조선 함대가 선봉 명나라 함대가 후미에 있었습니다.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500척 함대를 향해 조선과 명나라 군은 화포를 퍼부었습니다. 그렇게 일본 함대는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투는 다른 전투와 조금 달랐습니다 500척의 함대가 꾸역꾸역 들어오니까 포를 발사해도 계속 밀어 닥쳤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투는 원거리 포격전 이던 이순신의 다른 회전 들과는 다르게 서로가 얼굴이 보일 정도의 근접전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밤이라서 피아 식별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곳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조선의 모든 당시 최신 병기가 불을 뽑았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발악을 했습니다. 여기서 지면 다시는 못 돌아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부터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어 얼마간 불꽃과 포성이 난무하는 전장 하지만 갑자기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바로 명나라 함대에 큰 빈틈이 뚫린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의 장수 등자룡이라는 자는 조선 판옥선을 타고 전투를 수행했는데 이 때 명나라 군은 대포의 운영이 미숙하여 실수로 오발 사고를 냈습니다. 때문에 등자룡의 판옥선은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불타는 배로 온 일본군의 시선이 집중되어 일본군의 함선 세키부네가 그곳에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등자룡의 배는 점령당하고 등자룡은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곧 세키부네가 깊숙이 들이닥쳐 진린의 판옥선 까지 포위했습니다. 진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위기를 느낍니다. 조선 입장에서 명나라의 해군제독인 진린이 목숨을 잃으면 큰 일이 발생합니다. 때문에 이순신의 대장선이 출동해 진린을 구하러 갑니다. 다행히 이미 명량해전에서 홀로 133 척의 배를 상대했던 이순신의 대장선은 모든 세키부네를 격파하고 진린을 구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을 필두로한 조, 명 연합군은 맹렬히 일본군을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몇 시간이 지나자 일본 수군은 그때까지도 포위를 뚫어 낼 수 없었고 이렇게 가다가는 일본군 전원 몰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퇴 할 수는 없었습니다. 뱃머리를 돌리는 즉시 일본군은 집중 공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일본군은 한 가닥 희망을 발견합니다. 일본의 선봉 함선이 왼쪽 바닷길이 열려있습니다.  바로 퇴로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실제로 노량을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본 일본 함대는 일제히 그곳으로 노를 저었 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뱃머리를 돌린 일본군 하지만 그들은 곧 충격적인 결과를 맞닥뜨립니다.

     

    일본군이 도착한 곳은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 곳은 관음포 라는 곳으로 남해도 부근에 깊게 패어 있는 지형인데 관음포를 지나쳐 가서 앞으로 쭉 가야 일본 함대가 빠져나갈 수 있는데 이 관음포은 페인 길이가 깊어서 언뜻보면 물길이 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은 지나치지 않고 여기로 새서 관음포로 그대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본군은 관음포에 갇혔습니다. 말그대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고 이순신과 진진은 빠르게 관음포로 진격해 이들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이제 일본군은 빠져 나가려면 이순신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은 이때 정말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했습니다. 이걸 못 뚫으면 모든 희망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군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저항했고 화공까지 전계했습니다. 하지만 조, 명 연합 함대는 이 모든 시도를 분쇄하고 적선을 부수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시간은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고니시는 이 때 전투하는 것을 틈타 오히려 함대를 이끌고 몰래 도망쳤습니다. 자신이 구원군을 요청해 놓고 정작 도망가는 비겁한 짓을 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훗날 고니시는 부하에게 손절을 당하는 등 굴욕을 겪게 됩니다. 반면 시마즈 함대는 아비규환 속이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자신도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자 일본군은 자기가 자랑하는 최첨단 서양발 신무기 조총을 난사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조총 사격으로 조선 병사들을 겨냥해도 일본군은 판옥선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결정을 합니다. 총구를 조선의 장군들에게로 돌린 것이었습니다. 자기 우두머리가 죽으면 무너지는 일본군은 조선의 장수를 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격전 중 사격으로 10명이 넘는 조선 장수가 안타깝게도 탄환을 맞아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선 수군은 더더욱 분노하며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은 한계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 오게 됩니다. 그러던 일본군은 새로운 표적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순신 입니다. 이순신은 진도 지휘를 위해 계속해서 최선봉에 서서 적들을 파괴하고 있었고 이에 일본군은 일제히 조준 합니다. 그리고 수십 알의 탄환이 발사되어 얘기치 않은 총격에 이순신의 곁을 지키던 송희립이 총상을 입어 기절 했고 이순신은 이에 놀라 일어서려다 총탄을 맞고 말았습니다. 이순신은 가슴 혹은 겨드랑이 쪽을 총탄에 맞았습니다. 아들과 조카 이완이 이순신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엄청난 굉음과 아수라장 속에서 그 둘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서서히 숨이 멎어 가던 이순신은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였습니다.

    아군이 자신의 죽음을 알면 사기가 떨어져서 적을 섬멸하는데 지체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했습니다. 향년 54세의 나이였습니다. 이순신은 그렇게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대장선 일부만 알고 나머지 함선은 알지 못했습니다. 대장선의 조선군이 이순신의 유언을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군은 계속해서 단 한척의 적선도 살아 나가지 못하도록 살육전을 버렸습니다. 지옥의 바다는 이순신이 전사 했음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더더욱 많은 왜군을 소멸 시켰고 전투는 그 날 정오가 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결국 맹렬한 전투 끝에 해전은 끝났습니다. 날은 밝아 있었고 조선 군은 수백 척에 달하는 적선을 분쇄했습니다. 그러나 적장 시마즈는 목숨을 부지하는 데는 성공했고 시마즈 나머지 함대는 구사일생으로 남해를 왼쪽으로 돌면서 도주 했습니다. 때문에 이는 안타까운 지점이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조선군의 대승이었읍니다. 일본군의 함대 500 척 중 부산으로 도망가는데 성공한 함선은 50여 척에 불과했습니다. 450척이 장부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기록에 나타난 조선 수군에 전과 만해도 200척 격침에 100척 나포였습니다. 반면 조선군의 판옥선은 불과 4척만 침몰 했습니다. 참고로 명나라 전함은 29척이 격침 되었습니다. 조선군의 판옥선도 격침 사례는 정말 드문데 이 전투가 엄청난 혈전이 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전투는 끝났습니다. 조선 역사상 이런 대승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진영으로 돌아온 모든 조선인들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곧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었습니다. 이 모든 승전을 가능하게 해주고 임진왜란에서 단 한번의 패배 없이 23번의 승리를 따내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이 전사한 것입니다. 모든 조선 국민들의 승리의 함성 은 곧 통곡으로 바뀌게 됩니다. 온 조선군은 흐 느꼈고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이순신이 자신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신이 나서 이순신 을 찾았는데 전사 소식에 그는 충격을 받고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 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하고 통곡했습니다. 이순신의 시신은 곳 운구되어 가족들이 있는 아산으로 옮겨 졌습니다. 운구 행렬은 전라도 고금도와 충청도 아산까지 이어졌는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통곡하고 모든 사람들이 운구 수레를 붙잡고 흐느껴서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징비록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명나라 군사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 집니다. 그리고 이순신 의 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있던 고금도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고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군의 장수 역시 엄청나게 많은 해전으로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