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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성장 바빌로니아 권력 변화 바빌로니아 역사적 전환 기원전 2300년 사르곤은 수메르와 아카드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가 통치한 이 지역은 이후 바빌론의 이름을 따 바빌로니아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가 이름을 빌린 도시 바빌론은 아직 기록에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 불과 했습니다. 사르곤은 바빌로니아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진군해 서쪽으로는 지중해 그리고 동쪽으로는 엘람까지 영토를 확장했다고 합니다. 특히 엘람은 이란 남부 지역에 위치했던 고대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라이벌 관계였을 정도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르곤은 생전에 총 34번의 전투를 치렀다고 하는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뛰어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르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나람 신의 통치하에 아카드.. 더보기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 바빌로니아와 수메르 역사 문명의 시작 바빌로니아와 수메르 오늘날 황량한 모래 사막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보면 이곳이 인류 최초 문명의 발상지였다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까마득한 옛날인 기원전 40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찬란했던 하이테크 고대문명이 탄생했습니다. 바로 바빌로니아 문명이었습니다.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인간이 본격적인 농경생활을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6000년경이었습니다. 작은 운하를 만들어 강물을 끌어 들이는 것이 가능해지자 척박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에까지 점차 많은 거주지가 생겨났고 그 결과 이 지역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났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000년 경에 인류 최초의 도시 우루크가 세워졌고 이 도시를 중심으로 수메르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이때가 얼마나 까마득한 옛날이었는.. 더보기
페리클레스 인물 (추대사) 페리클레스 기원전 446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국은 30년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덕분에 양국은 얼마간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아테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력을 넓혔는데 이들의 다음 희생양은 사모스였습니다. 사모스는 밀레토스와 더불어 이오니아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아테네는 사모스에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직접 함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선 페리 클레스는 여러 번의 전투 끝에 사무스를 굴복시켰습니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는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차지했습니다. 페리 클레스 자신도 이오니아 최대의 도시를 정복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 통치하에서 아테네는 번영.. 더보기
아테네 키몬과 페리클레스 키몬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기세를 몰아 바다에서도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러자 이오니아와 아이홀리스 그리고 에계헤에 있는 많은 도시들이 그리스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본 건 아테네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리스의 맹주는 단연 스파르타였습니다.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스파르타는 그리스 연합군의 대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테네는 가장 많은 함선을 보였음에도 군의 지휘권을 항상 스파르타의 양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 특유의 결정 장애와 지휘관의 기행으로 스파르타의 인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 합류한 도시 대부분이 스파르타가 아닌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막대한 재원과 군사력을 등의 업은 아테네는.. 더보기
두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파우사니아스의 마지막 테미스토클레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최후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어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파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페르시아군을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페르시아는 30만 병력 중에서 먼저 도망친 4만을 제외한 거의 전원이 전사는 괴멸적인 피해를 받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마르도니오스가 남긴 식기와 가구를 보자 마르도니오스에게 올렸던 것과 똑같은 요리를 내오라고 했습니다. 곧이어 요리사가 페르시아 시계에 담긴 산해진미를 대령가자 파우사니아스는 그 화려함에 경악했습니다. 장난삼아 그 옆 테이블에 스파르타 음식을 나란히 올려놨었는데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웃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계기가 돼서였는지 카오사니아스는 이때부터 수상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플라타이에서 뒷정리를 끝.. 더보기
플라타이아 전투와 페르시아의 몰락 테미스토 클레스 기원전 480년 그리세군이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패배를 한 크세르크세스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tn적인 우세를 앞세워 쉽게 그리스를 제압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편 승리를 맛본 테미스토 클레스는 곧장 헬레스 폰토스에 있는 다리를 파괴해 페르시아군의 퇴로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에우리비아데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만약 적의 퇴로를 끊는다면 공지에 몰린 페르시아군은 더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적이 본국으로 도망치게 내버려 두자고 말했습니다. 계획이 틀어지자 테미스토크레스는 페르시아 쪽에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지략과 용맹을 모두 갖춘 테미스토클레스의 명을 받아 이곳.. 더보기
그리스의 승리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 연합의 해군 기원전 480년 테르모 필레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상대한 페르시아군은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그리스군 전사자가 약 2천명 정도였던 것에 비해 페르시아군은 그의 10배에 달하는 2만의 전사자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해상부대 전령을 보내 전투 현장을 둘러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시체 대부분이 페르시아인이었기 때문에 그대로의 현장을 보여준다면 사기가 하락할게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군은 해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아군의 시체를 매장했습니다. 하지만 전장을 둘러본 해군은 유독 그리스 군신체만 한곳에 모여 있는 걸 보고 전사자수를 감추려는 왕의 의도를 파악했다고 합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군의 예상치 못한 활약에 꽤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 더보기